[나관호목사 칼럼] 내가 칼럼 쓰는 목적...은혜, 위로와 사랑 & 경고(?)
[나관호목사 칼럼] 내가 칼럼 쓰는 목적...은혜, 위로와 사랑 & 경고(?)
  • 나관호 목사
  • 승인 2020.07.05 2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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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목사의 행복발전소 115]

개인의 역사 세밀히 지켜보시는 하나님/
위로와 토닥거림,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하고 파/
기독교의 변증가가 되고 싶습니다/

【뉴스제이】 아무개가 “왜 목사님은 칼럼에 개인적으로 일어난 이야기를 쓰시느냐”고 묻습니다. ‘행복칼럼’, ‘십자가 칼럼’, ‘나관호목사 칼럼’ 등 여러 가지를 씁니다. 각각 주제가 다릅니다. 내가 칼럼을 쓰는 가장 중요한 목적 첫째는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를 도우시며, 개인의 역사 속에서 세밀하게 지켜보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둘째 목적은 기독교의 변증가가 되고 싶습니다.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십자가 사랑을 불신자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셋째 목적은 내 삶과 생활 속에서 역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통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사람을 전하고 싶었고, 더 나아가 행복하지 않았던 이야기도 전하면서 내가 당한 것처럼 똑 같은 어려움인 이간질, 모함, 거짓말 선동, 억울함 등을 당했지만 말도 못하고, 공격도 못하고, 그저 “살아계신 하나님은 다 아시지요”, “내 마음 아시잖아요.”억울함 풀어 주실 것이지요.”만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위로와 .토닥거림.을 전하고 싶습니다. 힘 내시라고..........

​ 온누리교회에서 기도하며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 뉴스제이 

그리고 이간질했던 자, 모함했던 자, 거짓말 선동했던 자, 귀가 얇아 거짓선동에 푹 빠져(?) 신의를 저버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와 당신들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분명 심판하실 것이라는 경고(?)도 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동전의 앞뒤처럼 ‘사랑과 심판’을 동시에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고(?)는 이간질 당하고, 모함과 거짓 선동 당해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그 아픔을 만져주는 것이기에 또한번의 위로이기도 합니다.

『행복칼럼』은 내 생활 속에서 일어난 행복이야기에 ‘교훈’을 담아 칼럼을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딸아이들이 준 교훈과 감동, 집사람과 나라를 위해 기도한 행복, 작은 선물에 감동 받은 이야기 그리고 치매어머니를 모시며 얻은 행복 같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행복칼럼’은  맑고 밝음 속에서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합니다.

그러다가 『나관호목사 칼럼』을 쓰게 되면서, 『행복칼럼』과 반대되는 행복하지 않았던 과거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바른 정신과 신앙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했던 과거 이야기, 모함 받은 이야기, 이간질 당한 이야기, 거짓선동으로 내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끊은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교훈과 경고(?)를 전합니다.

그것은 이간질 당하고, 모함 당해본 사람만이 알고 있는 그 아픔이기에 그들을 위로하며 더 자세히 말합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안계신 줄 알고, 그런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생활 가까이에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런 모함과 거짓선동, 이간질 자체를 시도 못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함 당한 에피소드 하나를 말하려 합니다. 20여년 전, 내가 사이드에서 몰래(?) 모시던 분을 위해, 거의 매달마다 언론 인터뷰를 하시도록 해드렸습니다. 거의 10여군데도 넘는 언론사를 한꺼번에 모이도록 했습니다. 기자들은 “나부장님이 그분의 이미지를 만들어 드리네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기자들은 그분의 인터뷰 사진을 꼭 보내와 내가 스크랩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행사나, 커피타임하는 만남까지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가벼운 커피 타임에도 날 꼭 주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분을 만날 때는 비서에게 '비서실에 사람들이 없을 때' 나를 불러 달라고 했을 정도로 숨어 있었습니다. 그분 곁에 누가 있으면 분명 공격할 것을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누가 와서, 나에 대해 말도 안되는 이상한 말을 하면, '꼭' 삼자대면 해주세요"라고 웃으며 몇번 강조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일본행사에 다른 일행들과 함께 동행해달라는 그분의 요청으로 동행해 사진으로 잘 남겨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사진들은 그분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본행사 참여가 화근이었습니다. 내가 그분을 모시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아무개와 아무개가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습니다. 죽일 듯 달려들었습니다. 고마운 것은 선배 목사 두분 목사님이 그런 사실을 알고 나를 변호해 주었습니다. 나를 살리려고 그분에게 알렸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분을 위해 “내가 목회를 배우기 위해 지방으로 자원해 내려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그분 곁을 떠났습니다. 사실을 조금 알게된 그분이 날 살리려(?) 했지만, 그분 주위에도 날 죽일듯이 견제하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결단하고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이유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말렸습니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시끄러우면 그분이 행복하지 못하니 내가 자리를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방 가는 날, 일부러 그분을 만나지 않고 비서에게 내가 그동안 스크랩 했던 사진들을 그분에게 드리라고 부탁하고 만남을 정리했습니다. 내가 할 일을 또 누군가가 해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년 후, 우연히 그분을 내가 강의하는 학교에서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만나자 마자 첫번째로 하시는 말씀이 자기 곁으로 다시 오라고 하시며, 또 한가지 하시는 말씀이 충격이었습니다. 

“나 실장, 아니 목사님! 내 사진 가지고 다니며 자랑한다면서요?”

무슨 이런 모함이 있나? 나는 아니라고 했지만 곁에서 얼마나 신뢰할 만한 사람이 그럴 듯하게 모함 했는지 믿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속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잖아요. 누가 갓난아이 같은 말도 않되는 소리로 모함 했을까요? 내가 그랬다면 내가 지옥자식이 되고, 그 사람이 거짓말 했다면 그 사람이 지옥 자식이 될거라고 말할 까요? 하나님은 다 아시잖이요”

“참아라 아들아! 내가 다 안다. 사단의 장난이다.”
 
그분을 다시 동행하며, 짧은 시간이지만 다시 가까이 모실 수 있었습니다. 학비를 데줄테니 외국 박사과정 공부도 같이 하자고 하셨지만 내가 거절했습니다. 그분을 모시는 사람이 같이 공부한다는것이 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너무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다시 모시다가 갑자기 그때 내가 맡겨 놓은 사진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구나 누군가가 그 사진을 보고, “나목사가 왜 그분 사진을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 뭐야 이거? 왜 모았을까?”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은밀히 모셨으니까요. 그분 비서와 내 밑에 있던 과장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 과장이 그분을 모셨던 적이 있어서 알아도 아해할 사람이었으니까요. 1차원적인 상식으로 보더라도, 내가 만약 그분 사진을 들고 자랑하고 다닐거면 왜 주고 옵니까. 깊이 간직해야지요. 그런 모함을 당해 그분과 관계를 거의 끊어 놓았습니다. 사단의 장난이요, 거짓의 선동이며, 모함의 기술자 작품입니다. 이런 일도 당해 본 ‘나목사’입니다.

그래서 내가 또 말도 없이 그분을 다시 떠나야 했습니다. 싸우는게 싫고 그분에게 근심거리를 드리고 싶지 않아, 출근 자체를 안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에도 그 '사진 모함사건'은 살아 움직입니다. 그분 마음 속에 '거짓선동'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짐작하는 그 거짓 선동자가 그분 곁에 멀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분 마음 속에는 아직도 그 '사진 모함사건'이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축복하고 기도하며, 그 거짓선동자도 기도해 주며 그분과의 관계를 영원히(?)끊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위로 하십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마침, 칼럼을 쓰고 있는데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는데, 취직이 않되고 있다며 기도해 달라는 제자의 연락이 왔습니다. 마침 그 제자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많이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그 제자의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많은 상담을 하며 위로와 평안을 누리도록 돕곤 했습니다. 지금도 기도의 동역자로 살아갑니다. 너무 착하고, 거절 못하고, 주는 것 좋아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런 제자입니다.

심지어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땅을 빼앗기기도 했고, 너무 착해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결국, 잘못을 뒤집어 쓰기도 하고, 자기 등록금을 먼저 다른 학우에게 주기도 하고, 봉사도 잘하고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그런 제자입니다. 내가 칼럼을 쓰는 목적에 잘 맞는 사람입니다. 연락 된 것,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응원입니다.

나관호 교수목사

나는 간절히 그 제자의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 제자도 내 칼럼을 보고 ‘힘이 나고, 감사하다’는 문자를 자주 보내오곤 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제자들이 내 글을 잘 보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 시대의 인터넷 간접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사람이 교정을 봐주며 나를 응원합니다. 집사람은 나의 첫 번째 팬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잖아요. 힘내세요 우리 목사님!”

나는 울며 답합니다.

“모든 것이 그저그저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나관호 교수목사 (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119긴급기도운동본부 대표 / 조지뮬러영성연구소 소장 / 대중문화 및 교회사 강의교수 / 치매가족 멘토 / 기독교윤리운동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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