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칼럼] 코로나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사는 길 ... "작은 것, 좁은 문, 즉 ‘작음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은혜칼럼] 코로나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사는 길 ... "작은 것, 좁은 문, 즉 ‘작음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 나관호 발행인
  • 승인 2021.02.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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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교회에 바란다 《15》

교수목사의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살펴보고, 진단(?)하고 나아가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더 새로워지고, 세상을 향해 성경적 소리를 내고, 귀한 십자가 사랑을 바탕으로 '예수운동'(Jesus Movement)을 전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모든 글과 생각나눔이 "한국교회 자정운동"의 씨앗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뉴스제이】 근래에 가장 핫한 이슈는 아마 노래 잘하는 무명가수 중, 숨은 고수들을 소환(召喚)한 ‘《싱어게인-무명가수전》(Sing Again)’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승한 이재철 목사님의 아들 ‘30호 가수’ 이승윤 군이기도 합니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싱어게인' 우승자 승윤군을 지칭해 "한국 개신교에 무명가수 30호의 등장은 아침 햇살 같은 선물이다. 한국교회가 ‘정면교사’의 한 사례로 받아들일 때 선물은 그 진가를 제대로 드러낼 것이다.”라고 칭찬 한바 있습니다. 그래서 승윤군이 큰 기획사에서 대형스타, 큰 스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적당한(?) 스타, 그것이 승윤군에게도 행복할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 목사인 나는 무명 목사들 중 숨은 고수들을 소환(召喚)하는 ‘《썸어게인-무명목사전》(Sermon Again)’이 열리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수는 ‘노래’(Sing)하는 사람이니 ‘싱어게인’이고, 목사는 여러 가지로 대표성을 말할 수 있지만 ‘설교’(Sermon)하는 사람으로 1차 규정하고 ‘싱어게인’과 비슷한 어휘로 ‘썸어게인’이라는 말을 재미있게 만들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썸어게인-무명목사전》(Sermon Again)’에 참여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한국교회와 목사님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낮은 자리에서 내놓습니다. 

내 글을 읽으신 어느 분이 "이름 없는 작은목사가 아니라, '이름없는 하나님의  작은사람'을 찾는 일이옵니다"라고 소회를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라고 진심으로 고백하고 그런 마음으로,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면 좋을 것입니다. 코로나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사는 길은 "작은 것, 좁은 문, 즉 ‘작음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코로나 사태는 지구상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나라, 가장 큰 부자. 가장 큰 권력, 가장 큰 발전시대 그리고 가장 큰 교회를 순식간에 흔들어 놓았습니다. ‘가장 큰 것’을 ‘가장 작은 것’으로 흔들어놓음을 허락하신 것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이미 성경은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간과하지 못했습니다,

어젯밤, 꿈과 함께 일어나 기도할 때 영화처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한국교회와 목사님들 그리고 성도들에게 무명목사인 제가 작은 불꽃이 되어 깃발을 흔듭니다. 고등부 중창단 시절, 가장 많이 부른 성가가 “작은 불꽃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였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키어 / 곧 주의 사람들 그 불에 몸 녹이듯이 /

돌로 쳐 죽이라는 군중의 소리 속에서 간음한 여인. 작은 자를 감싸고 용서하시며 새로운 기회를 주신 예수님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에서

예수님의 모든 시작과 삶은 ‘작은 것’

예수님은 아프리카 북부 가장 큰 땅 애굽(이집트)과 중동의 거대한 아랍국가들 사이 가장 작은 땅, 가장 작은 나라 이스라엘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유다족속 중 가장 작은 족속(미가 5:2), 유대 고을 중 작은 마을 베들레헴(마2:6)에서, 그것도 가장 낮고 천한 작은 마구간에서 탄생하셨고, 달동네 같은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목수의 위치란 어느 정도였을까요?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기적과 능력의 말씀을 전하신 후, 잠시 고향 나사렛을 방문하셨을 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환영하기보다는 경멸과 모욕을 보냈습니다.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그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들은 아버지 요셉의 직업을 들먹이며 경멸했고, 바리새인과 제사장 무리와 나다나엘 조차 "나사렛에서 무슨 선지자가 나겠느냐?"(마 13:53-58) 멸시했습니다.

나사렛은 촌 동네인데 나사렛 촌동네 사람들조차 목수의 직업을 비하한 것을 보면 목수는 지극히 작은 자 중 하나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해서도 트집을 잡았습니다. 어머니를 ‘마리아’라 불렀습니다. ‘마리아’는 지극히 평범한 이름이자 평범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당시 평범한 여자들의 이름은 거의 ‘마리아’였습니다. 우리의 순희, 순자, 영희, 영자, 춘자처럼. 이것이 예수님에게 수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예수님을 더욱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했습니다. 비천한 자기들 동네에서 훌륭한 인재가 났으니 말입니다. 고향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걸고 잔치를 열듯이 환영했어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멸시를 당했습니다. 이유는 작은 마을, 작은 목수 가문, 아주 평범한 엄마와 배운 것 없는 사회 속 작은 형제들. 무엇하나 크고, 대단하고, 부자도 권세가도 아닌 집안과 가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 작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최소한, 수도 예루살렘의 건축업자 집안이나 수공업자 집안에서만 태어나셨어도 평가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이 작고 초라했습니다. 그러나 ‘작음’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의 한국화 - 작은 아이들을 축복하시는 예수님    Ⓒ김기창 화백의 《예수님의 일생_한국화》 카카오 TV 캡처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의 한국화 - 작은 아이들을 축복하시는 예수님    Ⓒ김기창 화백의 《예수님의 일생_한국화》 카카오 TV 캡처

사단의 시험, 신앙심 & 스타 & 돈 

예수님이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를 하며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먼저, “돌들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라는 시험을 당하셨습니다.(마 4:3) 이것은 사람이 육의 양식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영적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을 넘어 더 깊은 부분은, 먹고 사는 문제에 메여서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40일금식기도 약속을 어기라는 신앙심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두 번째 시험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시험했습니다.(마 4:5-6)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은 표적 곧, 이적 기사와 관련한 시험입니다. 천사를 보내서라도 다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이니 '어디 한번 뛰어내려서 하나님이 보호해 주시는가?'를 시험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the) 스타’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예수님을 당장 '능력의 스타'로 모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누가복음 23:11)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전, 해롯은 '빛난 옷'을 입혀 사람들에게 스타처럼 눈에 띄어 보이도록 했고, 희롱하고 업십여기며 조롱했습니다. '빛난 옷을 왜 입혔을까요? 

훗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병사들이 '유대왕'이라는 푯대를 십자가 위에 붙인 것은 헤롯왕이 있는데, 예수님이 '유대왕이냐?'라고 조롱을 담은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의 원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스스로 ‘스타만들기’를 했다는 누명입니다. 예수님은 영적인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지만, 큰 왕노릇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대적하여 승리하셨습니다. 

세번째는 엎드려 경배(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며 시험했습니다.(마 4:8-9) 한 번만 절하면 세상의 부귀영화 즉, 큰 부자되고 큰 명예자리 오르게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경배와 예배, 곧 우상숭배의 시험입니다. 더 나아가 그 우상은 세상의 지배자 ‘돈’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는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 아니면, 돈을 섬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문제 해결 방법이 금과 은은 내게 없지만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오직 음과 금으로, 돈으로’ 물질을 앞세워 해결하려는 습성에 대한 경고입니다.

“재물”은 헬라어로 “맘모나스”(mamonas)라고 하는데, 아람어 “맘몬”(mamon)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처럼 신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고 탐욕이 많았기에 종교를 빙자해서 돈을 버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꼴을 보시고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작음의 영성'

성경은 승리의 길, 해법의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하고”(마태복음 25:2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야고보서 3:5)

사도바울도 '작음의 영성'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라고.

‘작음의 영성’에 대해 다른 말씀들을 더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 분열, 성도 이간질하는 작은여우 거짓말쟁이 잡아야한다’(아가 2:15)/ 
“예수님 탄생지 베들레헴은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다‘(마 2:6)/ 
‘계명 중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가르치면 천국에서는 작다‘(마 5:19)/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주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마 10:42)/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마 11:11)/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씨가 크면 새들이 와서 깃들인다‘ (마 13:32)/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명해, 산을 옮기고 못할 것 없다’(마 17:20)/ 
‘작은 자 하나 실족시키면, 연자맷돌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마 18:6)/
‘작은 자를 업신여기면, 천사들이 아버지께 아뢴다‘(마 18:10) / 
‘작은 자 중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 18:14/)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다.‘(마 25:40) /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안한 것이 예수님께 안한 것이다‘(마 25:45) / 
‘예수님이 타신 배는 작은 배다’(마가복음 3:9) /  
‘5병이어 기적의 재료는 작은 생선 두어 마리다’(막 8:7) /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눅 7:28) /  
’어린아이 같이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다‘(눅 9:48) /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한다‘(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눅 16: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해야 열 고을 권세 얻는다’(눅 19:17)/ 
‘지극히 작은 키가 사공의 뜻대로 운행한다”(야 3:4)/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한다’(야 3:5)/ 
‘작은 불이 많은 나무 태운다”(야 3:5) /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 지켰다‘고 칭찬하셨다’(계 3:8)/  
‘사도요한이 본 두루마리는 작은 두루마리다’(계 10:10)

여러 성경 속 ‘작음의 영성’에 대한 부분 중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마가복음 3:9) 말씀에서 ‘예수님이 타신 배는 작은 배였구나’ 고로, ‘목사들도 작은 차를 타면 어떨까’라고 흥미로운 생각했습니다,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의 한국화 - 선한 사마리아인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1913-2001) 화백의 한국화 - 선한 사마리아인      Ⓒ김기창 화백의 《예수님의 일생_한국화》 카카오 TV 캡처

‘대(大)성회’, ‘대(大)성전’, ‘대(大)예배’

한국교회는 부흥을 위해 달려 왔습니다. 그것은 내적 외적으로 크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한 자연원리입니다. 부흥은 커지고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흥’이라는 단어를 외형적으로만 해석해 일부 목회자들은 큰 교회, 큰 예배당, 많은 성도 수를 향해 달려왔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들은 자연히 예배당의 크기와 성도수가 마치 자기정체성으로 착각하고, 자기모습이라고 착각(?)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큰 예배당과 많은 성도수를 가진 목사들과 능력이 나타나는 부흥사들을 성도들 일부는 그들을 마치 스타(?) 같이 대했고, 그러다보니 큰 것을 향해 달려가도록 부축인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성장, 자연부흥이 큰 장소에서, 많은 성도가 모이는 ‘대(大)성회’, ‘대(大)성전’, ‘대(大)예배’를 주장하는 그림을 향해 달려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대형교회는 나쁘고 작은 교회가 좋다는 판단은 아닙니다. 큰 것 속에서도 ‘작음의 영성’을 놓차지 말고 겸손히 사역하고, 낮은 자의 마음으로 살아가야한다는 성경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대형교회와 대성회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모이게 하면, 커지는 것이니까요? 그리스도의 몸 교회도 나이가 들고 시간이 가면, 커지는 것이니까요. 크기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대성회 가운데서도 '작은 것'을 잊지 않고 귀하게 여기고, 성경을 따랐으면 됩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한 영혼이 귀하다”라는 구호가 하나님 앞에 '립서비스'(?)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목사들이 지하에서 개척하던 시절, 천막에서 개척하던 시절, 가정에서 개척하던 시절의 ‘한 영혼의 귀함’을 잊은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또한 목사가 ‘연봉’이라는 논리에 사로잡혀 돈에 의해 몸과 마음이 움직여지고, 혹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돈'이 '말씀'보다 더 큰 힘 처럼 되고, 돈으로 해결하려 들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돈으로 관계를 만들려한 것은 아닐까요? 종으로 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서 “아골골짝 어디든지 가오리다“ 찬양부르며 약속했던 시절을 잊고 산 것은 아닐까요? 사모들도 포함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언제부터인가 목사와 사모들이 성경 속 예수님과 그분의 삶을 잊었습니다. 참된 성경의 가르침을 잊었습니다. ‘작음의 영성’을 놓쳤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왕의 옷인 홍포를 입혀 ‘유대인의 왕’이라는 큰 자리와 스타 자리와 부유한 자리의 존재처럼 보이도록 꾸미고, '거짓 '프레임'을 씌워 십자가에서 발가벗기고 죽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큰 것, 넓은 문을 따라가면 결과는 발가벗겨지고 거짓스타가 되어 죽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코로나 사태에서 가장 힘든 교회는 '큰 대출'을 받아 '큰 예배당'을 건축했지만 성도가 적은 교회와 커다란 예배당에 성도들이 모이지 못하는 교회일 것입니다. 건물의 의미, 큰 예배당의 의미가 없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앞으로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되어도, 예전처럼 교회 예배당 크기에 대한 의미가 분명히 적어질 것입니다. 

나는 학교강당을 빌려서 ‘주일오후교회’인 "두나미스교회"를 개척해 예배와 찬양을 올려드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선견지명'(先見之明)입니다. 그런데 그때 핍박(?)도 받았습니다. "그게 교회냐고? 성전도 아닌데?"라며. 심지어 강당을 빌려준 사람조차 그랬습니다. 그래서 계속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나중에 보니 강당을 빌려준 주체자가 예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디어를 빼앗아 간 것이지요. 

코로나 시대, 교회와 목사들 그리고 성도들이 영적 눈이 열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작은 것, 작음, 좁은 문, 한 영혼, 한 개, 하나 등 "귀한", ‘작음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동시에 큰 것, 큼, 넓은 문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큰 예배당을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성도들이 함께 모일 그날을 생각하며, 코로나시대에는 더 크게 예배당 짓기를 경쟁하듯 하지말고 ‘작음의 영성’을 회복해 예수님을 닮아가면 될 것입니다. 대형집회도 가능하면 자제하면서..... 


흠잡기 녹음목사, 녹음성도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몇 달전, 지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무게 목사를 언급하기에 '중간에 끼어 그분이 제일 힘들 것'이라고 내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과 나를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화건 사람이 다시 병든 몸을 가진 어떤 목사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아무개 목사 얼굴이 안좋다는데 아시나요?“ 나는 들은데로 ”몸이 안좋은 것으로 안다. 걱정이다. 치유되어야 할텐데.“라고 답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 사람 주변에, 나 보다 안부를 더 잘 알 사람이 수두룩 빽빽한데 나에게 묻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개미같이 작은 소리로 ”다른사람 눈에 피나게 하면 안 되는데“라는 비슷한말(지금기억으로)을 했습니다. 그순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녹음하고 있구나’ 

그러더니 한참 동생뻘인 누군가의 칭호를 할 때, 평소에는 이름을 부르던 사람인데 존칭과 ‘님’자를 붙이기에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눈치챘습니다. 무슨 이익을 얻기에 그럴까? 그후부터 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적당한선에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는 한결같이 ‘나에게 실수와 무례를 범한 사람 몇을 언급'하며,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예를들면, 무례한 인간 하나는, 어느 신우회 예배를 갔는데 일정담당 신학생이 내가 큰 교회 목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인사성도 없고, 존중함이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학생은 '나의 제자의 제자'에게서 강의를 들으니 나는 그 학생의 '증조할아버지뻘 교수'인데도 말입니다. 또다른 무례한 인간 두번째는  그 후배 교회에서 식사를 할 때 음식을 가져다준 권사님에게 내가 "고맙습니다"라고 안사했더니, 다음날 나에게 들려온 소리는 "나목사님은 목사로서 훈련이 안되었네요" 였습니다. 권사님에게 감사인사를 한 것이 훈련이 안된건가요? 아니면 "음. 그래! 잘 가져왔소" 이런 거만한 태도로 권사님을 처다보지도 않는 것이 훈련된 건가요? 그 후배 목사는 식당에서 봉사하는 분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그 후배목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들을 거론하며, 그 지인은 나의 태도에 대해 흠잡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한 감정을 숨길 이유도 없고 해서 “별로 안좋아 한다”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개미같은 목소리로 “거봐(그것봐)라고 했습니다. 누군가와 같이 듣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듯 그의 의도 50%정도에 맞춰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비밀도 말했고 솔직하게 대해줬던 'O녹음 지인'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라고...

성경은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잠언 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언 20:19)고 교훈하십니다.

비밀누설자가 많습니다. 무서운 세상, 말세입니다.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거짓왜곡’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경의 핍박 받은 사람들, 예수님을 포함해서 모두는 ‘미움’ 받은 것이 아니라 ‘거짓왜곡’으로 당한 것입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은 예수님과 믿음의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왜곡’으로 죽이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일명 ‘O녹음 목사'도 있습니다. 이메일 제보를 받고 알았습니다. 모두 통화 녹음해 남의 흠을 잡아 그것을 보고(?)하는 형태로 상을 받으려는 무뇌아가 있다는 것을.... 이런 것도 한국교회 신앙현실 한부분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임마누엘!

코로나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사는 길은 "작은 것, 좁은 문, 즉 ‘작음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관호 목사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문화평론가 및 칼럼니스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조지뮬러영성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치매가족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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