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겼습니다
어머니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겼습니다
  • 나관호
  • 승인 2019.05.18 1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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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맨토링 1] 복잡하지 않은 퍼즐을 날마다 함께 맞추기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우리네 생
새벽녘에 나오시더니 아들인 나를 “오빠”라고 부르셨다.

【천국가신 치매어머니를 생각하며 치매환자와 치매가족을 돕기 위해, 14년간 치매 어머니와 나누었던 삶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치매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울고 웃었던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봅니다. 나의 삶의 경험을 나누며 '치매환자와 치매가족을 응원합니다.'  】


【뉴스제이】  팔순 나이가 되어 쭈글쭈글한 손과 깊이 파인 얼굴의 주름, 구부정한 어깨를 가진 어머니를 보면 세월의 흐름을 느낀다. 나 또한 불혹이 넘은 나이가 되어 옆머리에 생긴 흰 머리카락을 뽑고 있으니 시간은 흘러간 모양이다.

더구나 어머니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겨나 잠결에 나오시면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될 때가 있다. 어느 날은 새벽녘에 나오시더니 아들인 나를 “오빠”라고 부르셨다. 어린시절 꿈을 꾸셨던 모양이다. 잠시 후에야 아들을 알아본다. 어머니 머릿속에 지우개가 생긴 모양이다. 기우가 아니길 바랐다.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모아 글을 쓰려 하니 여러 생각이 스쳐 간다. 어린 시절 시장에 따라 갔다가 어머니의 손을 놓쳐 울면서 어머니를 찾았고, 어머니의 등에 업혀 돈을 빌려준 이웃집을 찾아갔던 일도 생각난다. 아버지 몰래 빌려주었던 그것을 찾으려고 어머니는 밤마다 마실을 다녀야 했다. 갈림길에 서면 어머니는 나에게 어느 쪽으로 갈지 묻곤 하셨다. 돈을 빌려 줄 때와 받을 때는 신분이 바뀐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런 모습을 봐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친목계 모임에 같이 가서 냉면을 먹었던 일, 노래를 부르시면 한복 치마를 잡고 옆에서 노래를 같이 불렀던 추억이 스쳐간다. 아줌마 부대들이 명승지로 단풍놀이를 갈 때도 나는 꼭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하얀 스타킹에 반바지, 럭셔리한 모자를 쓰고 한복 입은 어머니 곁에 늘 있었다. 어머니 또래 아줌마들의 아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늦게 세상에 나온 나는 어머니를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

제주도 여행에서 '찰칵'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밤마다 텔레비전을 보려는 사람들로 안방은 가득했다. 그중 '진패'라는 이름을 가진 나이 든 뇌성마비 장애인이 있었다. 그 사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나올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불쌍하다며 그 사람을 귀찮아하지 않고 늘 이해해주곤 했다. 훗날 그 사람이 죽었을 때도 무척 슬퍼하셨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학교를 찾아오는 다른 엄마들은 양장을 입은 젊은 분들이었는데 우리 어머니는 한복을 입은 아줌마였다. 그때는 그것이 창피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학교에 오지 못하도록 떼를 쓰기도 했다. 당시는 그랬다. 육성회장을 하셨던 아버지만 학교에 출입하실 수 있었다.

양복을 입고 선생님들과 웃으며 대화하시는 아버지만 좋았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께 죄송한 생각이 많이 든다. 어머니는 학교에 가져갈 걸레를 만들어 주고 운동회 때 사용할 오재미를 만들어 주셨고, 배변 검사용 비닐봉지에 나의 흔적을 담아 주시는 분이셨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어머니보다 키가 커지면서 친구들이 좋아졌다. 그때도 어머니는 나의 뒤에 계셔야만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나에게 희생적이셨다. 한번은 같이 과외 공부하던 여학생이 나와 가까워지면 공부가 방해를 받는다며 그 여학생을 혼내기도 하셨다. 내가 처음으로 본 어머니가 화내시는 모습이었다. 돌이켜보니 사춘기를 염려하셨던 모양이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어머니가 내 눈과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철이 들면서 어머니의 귀중함을 알아갔다. 더구나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천국으로 보내고서는 더더욱 그랬다. 어찌나 어머니가 불쌍해 보이던지 지금도 그때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셨던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기도 그대로 지금 서 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어머니를 위해 빨간 내복을 사고 땡땡이 무늬의 원피스를 사드리기도 했다. 양장하신 어머니의 모습이 좋았다. 이제는 내가 돌봐드려야 할 시점인 것을 알았다. 교회 일에 많은 시간을 쏟으셨다. 그리고 어려운 구역 식구가 돈을 꾸러 오면 옆집에 가서 빌려서라도 도와주셨다. 그러나 결국 그 사람은 어디로 사라지고 우리가 빚을 갚아주어야 했다. 어린시절의 일이 재현되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 사람을 염려해주었다.

골이 깊이 패인 얼굴이 된 어머니는 길에 있는 리어카나 조그만 가게에서 과일을 사시곤 했다. 그런데 항상 상한 사과, 못생긴 귤만을 골라오셨다. 나는 나이가 들어가시면서 치매증상이 생긴 줄 알고 걱정했다. 그런 일들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때론 지나치다 싶어 어머니를 나무라듯 말했던 불효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변함이 없었다. 또 한 번은 10개의 사과가 들어 있어야 할 봉지에 9개만 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퍼즐하시는 어머니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어머니의 치매증상(?) 원인을 알았다. 빌라 앞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는 아주머니가 찾아와서는 “할머니가 상한 과일을 사시면서 우리는 금방 먹을 것이니 좋은 것은 내일 팔아요. 그리고 하나 덜 먹어도 되니 9개만 주세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몇 주 뒤에 교회에 가자고 전도를 받았는데 할머니의 사랑 덕에 교회에 안갈 수 없었다고 했다. 그 후 남편과 함께 교회를 찾아갔다고 했다. 그리고는 싱싱한 과일과 야채 더미를 놓고 갔다.

그제서야 어머니가 상한 사과를 가져오는 치매증상은 사랑을 나누는 행동인 것을 알았다. 그후부터 우리 집은 멍든 사과, 못생긴 귤만 먹는 집이 되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런 어머니의 교훈적인 삶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나도 노점상의 멍든 사과를 산다.

그랬던 어머니가 이제는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언젠가 어머니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주름이 깊이 패여 있었다. 그 주름의 깊이만큼 삶의 지혜, 사랑의 진한 향기가 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를 보면 머릿속에 작은 지우개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이 ‘퍼즐 치료법’이다. 복잡하지 않은 퍼즐을 날마다 맞추도록 해드렸다. 함께 했다. 머릿속 지우개가 크지 못하도록 일종의 두뇌운동을 시키는 것이다. 결과가 조금씩 나타났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사랑한다. 이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은 머릿속에 지우개가 자라는 우리의 모든 어머니, 아버지들과 가족들을 위한 작은 위로의 메시지를 던지고 싶어서다. 나이가 들수록 어린아이가 되어가는 우리 부모님들에 대한 섬김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도 늙은 부모가 곧 될테니까.

 

나관호 목사 ( 치매가족 멘토 / 칼럼니스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긍정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강의교수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뉴스제이’대표 및 발행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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