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한국교회,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전래 ... 한국 최초의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 서상륜 장로 성경들고 전도
[영성칼럼] 한국교회,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전래 ... 한국 최초의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 서상륜 장로 성경들고 전도
  • 윤사무엘 박사
  • 승인 2021.12.0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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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귀츨라프, 우리나라 입국 최초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 성경 전하며 마지막 기도/
마펫 선교사, 평양 끝까지 떠나지 않고 선교/

【뉴스제이】 한국교회는 1884년 9월 알렌 의료 선교사님이 한국에 도착하기 이전 68년 전에 킹제임스 성경이 먼저 조선 땅에 전해졌습니다. 1816년(순조 16년) 9월 5일 서천군 마량진 갈곶에 일시 정박한 영국 함선 알세트호의 선장 머리 맥스웰 함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첨사 조대복에게 킹제임스 성경이 전해졌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200주년이 되던 2016년에 개관된 한국최초 성경전래 기념관(충청남도 서천군 서면 마량리 137, 이병무 관장, 041-951-1816)은 성경 전래의 역사를 연구, 전시교육, 체험하여 국가와 세대를 넘어 바른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여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꾸며져 있으며 1,2층은 전시관 3층은 전망 카페 4층 다목적실 (예배당)이 있고 전시관에는 영국에서 제작된 킹제임스 바이블 원본(1611년)과 시기별 한국어 성경 번역본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기념관에서 400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성경 전래 기념비와 영국 범선 조형물 등이 비치된 야외 기념공원도 있습니다. 

카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 1803-1851, 폴란드 태생, 루터교 목사)는 1832년 7월 17일 한국에 온 첫 번째 기독교 선교사였습니다. 18세 때 베를린 선교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회심을 경험하였고 23세 때 네덜란드 선교회의 파송으로 그는 인도네시아, 싱가폴, 태국을 거치면서 독립선교사로 전환했습니다. 

1828년 태국을 방문한 최초의 기독교 선교사 귀츨라프는 방콕에서 선교하면서 태국어로 킹제임스 신약성경   전체와 구약성경 일부를 번역했습니다. 아내와 사별하고 방콕을 출발해서 마카오를 거쳐 그는 선교를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와 용선 계약을 맺은 507톤의 범선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에 선의(船醫)와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했습니다. 1832년 7월 17일 오전 10시경 귀츨라프 일행에게 조선의 연안이 눈에 들어왔으며 오후 5시경에는 처음으로 조선인들과의 우호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귀츨라프가 타고 있는 앰허스트호가 조선에 최초로 정박한 곳은 몽금포 앞바다의 몽금도(대도) 앞이었습니다. 이배는 다시 남하하여 뱃길을 따라 외연도(7월 21일)-녹도(7월 22일)-불모도(7월 23일)-고대도(7월 25일) 순으로 항해하였습니다. 특히 고대도(古代島)는 귀츨라프가 8월 12일 그곳을 떠날 때까지 선교기지의 역할을 했습니다. 고대도를 기점으로 하여 근처 도서와 내륙까지 선교할 수 있었음으로 한국 선교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섬으로 기록됩니다. 

또한 이 배는 조선에게 통상을 요구했던 최초의 서양 선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귀츨라프가 순조왕을 위해 준비한 진상품에는 지리, 천문, 과학서 외에 천, 모직물, 망원경, 유리 그릇 등의 선물이 있었고 중요한 것은 한문 성경 한 권과 기독교 전도 책자들이었습니다. 특히 한문 성경은 ‘신천성서’(神天聖書)인데, 이 성경은 중국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완역 성경으로 킹제임스 성경의 중국 번역으로 귀츨라프의 동역자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가 1823년 말라카(Malacca)에서 출판한 21권 낱권을 선장본으로 엮어 한 권으로 만든 성경이었습니다. 

귀츨라프는 고대도를 중심으로 펼친 선교 활동은 문화적 중개 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선교하면서 귀츨라프는 조선 언어를 통한 소통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7월 27일 귀츨라프는 오랜 설득 끝에 고관의 비서 양이(Yang-yih)로 하여금 한글 자모 일체를 쓰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에게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주면서 읽게 하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당시 먹을 것이 없어 빈궁한 삶을 사는 조선인들을 위해 감자를 직접 심고, 생산하는 방법을 글로 써주었습니다. 또한 야생 포도의 재배와 그것의 과즙제조 방법도 설명해주며 글로 써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선교 사역의 한 방편으로서 의술을 베풀며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한달간 서해안 지역을 선교한 후 8월 17일에 애머스트호는 제주도 연안에 도착했는데, 귀츨라프는 제주도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일본, 조선, 만주 그리고 중국을 잇는 선교기지로서 적합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제주도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잠시 동안 머물고 간 그는 제주도가 동방 선교의 기지로 확신했습니다. 

홍콩으로 간 후 조선에 자신의 대한 자신의 방문이 효과 있는 선교의 결실, “이 외딴 나라(remote country)에 좋은 씨가 뿌려졌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1851년 8월 9일 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 홍콩공원묘지( Hong Kong Cemetery in Happy Valley)의 기독교 구역에 안장되었습니다. 홍콩에는 그의 이름을 딴 귀츨라프 거리가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 (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자랐습니다.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 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세관에서 통역 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1865년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킹제임스 중국역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 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 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 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朴春權)관리는 6척이나 되는 장신에 기골이 장대하여 용맹스럽고 힘센 사나이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면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 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 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 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 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 토마스 선교사님의 성경보급으로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선교사님을 죽인 박춘권은 토마스 선교사님이 건내준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고 후에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 당하기 전, 다른 사람에게도 성경을 나눠 줬는데 최치량이라는 당시 12세 소년이 그것을 받아서 박영식 당시 평양성 관리(영문 주사)에게 건네주었습니다. 박영식은 성경을 보고 참 좋아했습니다. 당시에는, 책이나 종이가 매우 귀한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문 성경을 찢어서, 그 종이로 자기 집 방에 도배를 했습니다. 도배를 하고 보니, 아침에 눈을 떠도 성경, 밥을 먹을 때도 성경, 몸을 이리 뒤척여도 성경, 저리 뒤척여도 성경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도배한 성경을 읽다가,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1890년 평양에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馬布三悅, 1864-1939) 선교사가 들어옵니다. 그가 박영식의 집에 들어가 보니까, 그 벽에 중국어 성경책이, 벽에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평양에 최초로 선교사로 들어온 줄 알았는데, 자기보다 먼저 평양에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마펫 선교사는, 그 자리에서 뜨겁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주여,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그래서 마펫 선교사는, 평양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선교했다고 합니다. 이에 1893년 모펫(Moffett, S. A.)은 평양에 선교사업을 위해 정착하면서 한석진(韓錫晉)을 조사(助師)로 삼아 널다리(板洞)에 세웠던 회당으로, 처음에는 교회 이름을 ‘판동’ 또는 ‘널다리교회’라고 하였는데,  그 후 1899년 장대현(장대째 章臺峴)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 교회로부터 강서의 탄포리교회(灘浦里敎會)·청산포교회(靑山浦敎會), 대동군의 태평(太平) 외리교회(外里敎會), 중화군의 읍내교회(邑內敎會) 등 여러 교회가 파생, 발전하여 서북계 신앙의 발상지로서 선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1899년 이 교회에서는 병인양요 때 중군(中軍)으로 활약하여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포계(褒啓)로 안주 우후(虞候)라는 직책을 받은 바 있던 박춘곤(朴春坤)이 세례를 받으면서 신도가 급증하여, 교회당을 장대현에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인 교인들의 헌금액 5,000여 원과 선교사 보조금 수천 원으로 72칸의 교회당 건립에 착수하여, 1900년 준공하였습니다. 그 해 장대현교회는 김종섭(金鍾燮)을 장로로 장립(將立)하여 당회(堂會)를 조직하였습니다. 예배당은 ㄱ(기억)자로 건립되어 한때 남녀가 따로 한쪽 칸을 차지하여 앉도록 하였습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1907년 1월 14일부터 당시 신학교 졸업예정자인 길선주 장로의 인도로 한국에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해 9월 길선주 목사는 안수를 받고 위임목사로 시무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초대교회 지도자 터툴리언(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 약 155~240년 경)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영국 웨일즈의 하노버 교회(담임목사는 토마스의 아버지)에서 몇 달이 지난 후에,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신학생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가 만주에서 선교사로 섬기고 있었는데, (1872~1910 중국사역) 그가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얘기를 듣게 됩니다. 존 로스는, 심양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시작합니다. 심양 남쪽 40킬로 지점에 <고려문>이 있었는데, 거기엔 조선인들이 중국에 무역하러 오던 고을이었습니다.

존 로스 선교사도, 중국에서 사모를 잃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아이를 출산하다가, 소천하였습니다. 그래서 동병상련, 중국에서 아내를 잃은 토마스에게 더욱 관심이 깊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존 로스의 여동생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자기 부인이 낳은 아이를 대신 키워주게 됩니다. 이 여동생이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와 결혼하게 되어, 결국 존 로스와 매 타이어 선교사는 매제지간이 됩니다. 

그래서 심양 지역에서,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조선인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을 만나서, 조선말을 배우며 전도를 했습니다. 이후 인삼장사군인 서상륜도 합류합니다. 이들은 세례를 받고, 킹제임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당시 통용하던 문자(한자어와 이두)로 번역하여   1875년에 신약성경 27권을 완역하게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지 9년만의 일입니다. 1882년에 쪽복음 형태로 출판하기 시작하여 의주를 통해 밀반입합니다. 

로스 선교사는 1882년 10월 6일 한국 최초의 권서인(勸書人,colporteur) 서상륜에게 500권의 단편성경과 그 밖의 기독교 관계 소책자들을 주어 평안도 의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기독교 서적이 금서였기에 밀반입을 한 것입니다. 

서상륜은 자택인 황해도 소래(솔래)에 교회를 세우고(1883년 5월 16일) 보부상인들과 권서인들을 통해 조선 전국에 성경을 널리 보급했습니다. 그후 1895년 8칸의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896년 8칸을 증축하였습니다. 한편, 서상륜 장로가 1885년 7월 2일에 서울 새문안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정동제일교회가 1885년 7월17일 그리고 인천내리교회가 1885년 7월29일 설립)

이렇게, 한국교회 선교는 다른 나라 선교와 이점이 독특합니다. 선교사님들보다 성경이 먼저 전래가 된 것입니다. 

윤사무엘 박사 (겟세마네신학교 총장 / 겟세마네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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