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우리가 가진 자유 & 복음 안에 있는 자유
[영성칼럼] 우리가 가진 자유 & 복음 안에 있는 자유
  • 윤사무엘
  • 승인 2021.03.17 19: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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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 받은 자/
할례 받지 않은 디도를 데려간 이유/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기쁨/
윤사무엘 박사

【뉴스제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지만(행 15장)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뒤 십사 년이 지나서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도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라. 2 내가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포하는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되 명성 있는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하든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2:1-2)고 말씀하십니다. 

바나바와 함께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에서 난 레위족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이 그를 일컬어 바나바(Barnabas) 즉 ‘위로의 아들’이라 불렀는데 그가 밭이 있으니 팔아 그 값 모두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행 4:36-37).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한 자요(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요(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요(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어 바울의 1차 세계선교 여행을 동행한 자입니다(13:2-3).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과 그레데(Crete)에 남아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이며 할례를 받지 아니했고(갈 2:3), 디도서의 수신자입니다. 디모데와 더불어 바울 사도의 제자이면서 목회자였습니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대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예루살렘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님의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같은지를 대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 전파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했습니다(롬 1:16).

현상문제, 비본질문제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입니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 끝을 덮은 ‘겉가죽’(foreskin, 양피, 포피)을 잘라내는 의식으로 평생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의 표식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본래 태어난 지 8일 만에 받아야 하며,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언제든 할례를 받는 것이 개종의 선제 조건입니다. 

유대인의 할례파들은 기독교인이 될 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할례가 반드시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례는 본질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adiaphora=“it does not matter” 현상문제, 비본질문제).

고전 7:19-20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할례 받지 않은 디도
바울은 헬라인 출신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아니했습니다. 특히 문제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예루살렘회의에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입니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이비이단의 누룩들이 침투합니다. 진실한 목회자들은 그들을 분별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할례당들이 몰래 들어온 목적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말하는데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의식들, 제사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입니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도덕적 율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가진 자
어떤 이들이 가만히 들어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잠 25:26은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합니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교회 담임 / 겟세마네신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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