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칼럼] “내 맘 같을 줄 알았는데” ... "약자 돕는 것도 마음 맞을 때  도와야 한다"
[십자가칼럼] “내 맘 같을 줄 알았는데” ... "약자 돕는 것도 마음 맞을 때  도와야 한다"
  • 나관호
  • 승인 2021.02.19 0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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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남매 봉순이네 쌀집 식구처럼 살았다/
약한자 돕는 것도 마음 맞을 때  도와야/
‘내 맘’아! 이젠 좀 쉬어야해. 소비하지 말고/

【뉴스제이】 '귀한 분’을 주님 곁으로 보내드리고 나서, 왠지 눈물과 쓰라림이 있었습니다. 그분을 귀하게 여겼던 많은 사람들의 '아쉬움 눈물' 속에 나도 같이 서 있었습니다. 그중 ‘귀한 분’의 어려움 시작점을 아는 나에게는 더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별의별 생각이 생생하게 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준 많은 선물 중, ‘내 인생의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가셨습니다.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신 마지막 순간, 나는 울컥한 눈물과 함께 "주님 품에서 편히 쉬소서. 아멘"이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분과 가까이 있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의 결정적인 아픔의 시작점에 대해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생겼습니다. 지구상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것, 내가 바로, 바로, 바로 앞에서 경험하고 보고 들었던 그것. 그것은 어쩌면 말하지 못한 그분의 유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사람에게 “말해볼까”하고, ‘반에 반발짝’을 슬쩍 옮겨보았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분의 숨결이 담긴 물품 하나, 그것을 내가 가지고 있고 싶었지만 그것도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해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마음 담아 아주 작은마디의 ‘한소리’를 해보았고, 작은 날갯짓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헛다리 집기 같았고, “뭐야!”, “그럼 그렇지” 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지난 시간 가지고 있던 많은 다이어리와 책을 정리하던 중 그분을 모실 때 사용하던 다이어리가 발견됐습니다, 빽빽하게 지시사항을 날자칸에 써놓고, 많은 지시 사항과 그분 특유의 부르는 말투가 적혀있고, 타원형 동그라미가 많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오늘밤 피곤해 누워 기도반 생각반을 하며 주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생각하던 순간 인생숙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60을 바라보고 살면서 ,지금에서야 ‘마음으로, 삶으로, 몇 마디 대화, 한마디 말, 눈빛과 태도, 숨은 말투, '감춰진 마음을 발견하면서 깨닫게 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정말 정말로. 이제라도 깨달아 다행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맘 같지 않네”, “내 맘을 모르네”, “내 맘 같지 않게 대하네” 그리고 주님이 나를 향해 “네 맘 같지 않은 거야”, “네 맘 같은 줄 알아?”, 네 맘처럼 생각 안해“ 등등 “내맘, 네맘 시리즈”를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고기 아버지가 하신 유언이 생각났습니다. “OOO과는 같이 일하면 안된다. 그리고 네 맘 알아주는 사람과 일해야 된다. 마음이 맞아야 한다. 약한자를 돕는 것도 마음 맞을 때  도와야 한다.”였습니다. 

아버지도 ‘네 맘 시리즈’ 중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 까지 사람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이것입니다. 

6.25전쟁 때 동네 유지와 지식인들이 공산군에게 잡혀 중학교 강당에 갇히게 되었는데 우리 아버지도 예외가 되실 수는 없었습니다.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유지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아버지를 구해 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머슴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과거 아버지가 그 집에 갔을 때, 그 사람 동생이 소아마비로 아픈 것을 보시고, 한의사 친구에게 말해 한약을 지어다 준 진심담긴 아버지의 섬김이 아버지 생명을 살렸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때 생각을 가끔 하신다며 내 손을 꽉 잡으시곤 했습니다. 그것은 “내 맘 다해 진심으로 약자를 도와줘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어린시절 나의 돌사진을 내가 봐도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후부터 나는 봉순이네 아홉째가 되었다, 정말 봉순이네 쌀집 식구처럼 살았다. 내 돌사진     Ⓒ뉴스제이<br>
어린시절 나의 돌사진을 내가 봐도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후부터 나는 봉순이네 아홉째가 되었다, 정말 봉순이네 쌀집 식구처럼 살았다. 내 돌사진     Ⓒ뉴스제이

그리고 이것은 이번 칼럼에서 평생처음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가르침을 잘 따른 이야기입니다. 졸업 후 기자생활을 할 때 이야기입니다. 

월급 50만 원 정도 받을 때입니다. 월급을 받으면 제일 먼저 한 것이 십일조를 떼어 내고, 그 다음이 가게에 가서 참기름과 들기름 그리고 둥근 깡통에 든 큰 설탕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무실을 청소해 주시는 아주머니 두 분이 계셨습니다. 바닥을 걸레로 밀어주시고, 휴지통 비워주시고 가끔은 책상도 닦아 주시던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수고하셨다”며 섬기기 위해 산 것입니다. 그분들이 계신 자그만 처소 앞에 빨리 놓고 오곤 했습니다.

매달 한번도 빠짐없이 거의 계속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천성(?)이 작동한 것입니다. 물품도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찾아 돌려가며 섬겨드렸습니다. 수 년 후, 내가 신학 공부를 준비하기 위해 퇴사하고 방송작가와 자유기고가로 시간을 내가 조정할 수 있게하려고, 그 사무실을 나가는 날 어떻게 두분이 아시고 조용히 나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시더니  “그 동안 고맙고 감사했다”며 겨울용 여름용, 봄가을용 양말을 골고루 듬뿍 담아 선물해 주셨습니다. 서로에게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단지 사람 자체가 좋고, 아버지 가르침을 따르고, 수고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는데 그분들도 그동안의 진심 담긴 ‘내 맘’을 아시고, 고마워 하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내맘 네맘’을 알고 행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내가 나를 객관적으로 봐도 나는 근본과 천성적으로 사람을 좋아하기는 합니다, 누구든 경계 없이 대하는 것이 장점이며 단점입니다. 언젠가 다른 칼럼에서 밝혔던 “8남매 쌀집 봉순이네로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하는 나”에 대해 말할 때 핵심은 삼대 독자아들의 고뇌였습니다. 네다섯살 때 어머니에게 제일 많이 했던 말은 이것입니다, 

“엄마! 엄마! 헝아하고 눈나 만들어줭! 얼릉! 얼릉!!” 

다른 아이들은 누군가 식구들이 많은데 우리집은 나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안착한 곳이 ‘8남매 쌀집 봉순이네’입니다. 내가 9남매 집으로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좋았으면 50여년이 넘엇어도 8남매 쌀집에서의 생활이 띄엄띄엄 생각납니다. 생생히. 신기합니다.

어느날 봉순이네를 갔을 때, 그 집에서 고등어 조림무가 들어 있는 찌게와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는 조림무도 무리였습니다. 김치도 물에 씻어 먹던 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고등어 무조림을 처음으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것은 봉순이네 식구들과 밥을 먹으면서 봉순이와 그 위 봉학이 형 그리고 그 위의 누나와 또 그 위의 누나의 언니와 그 언니의 또 언니 등등 시끌거리며 밥을 먹으면서 나에게 매운 무조림 먹으라고 큰 누나가 먹여 주었는데, 그것을 오히려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불 하나에 모두 발을 넣고는 웃고 웃고 또 웃으며 “엄마!”를 불러가며 말하곤 했습니다. 나도 봉학이 형과 작은 또작은 누나 사이에 들어가 그냥 누워 버렸습니다, 그때 누나들이 “어머! 어머! 관호봐! 이쁘게 구네” 그런 말을 했습니다. 어린시절 나의 돌사진을 내가 봐도 예쁘고 귀엽습니다.

그후부터 나는 봉순이네 아홉째가 되었습니다, 정말 8남매 봉순이네 쌀집 식구처럼 살았습니다. 새벽 통금 해제 4시를, 3시부터 기다리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온 국방색 기억자 렌턴을 들고 첫날 어머니가 데려다주신 것 빼고는 혼자서 봉순이네로 출근했습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까지. 그분들은 ‘내 맘’을 알아주셨습니다. 아주머니는 문을 미리 열어 놓고 기다리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봉순이네 쌀집 식구들 모두”

그리고 지금도 3살 때 기억도 살아 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거의 마지막 순간에 할머니 방에서 애교를 부리며 놀다가 입에 떡을 넣어드린 것과 할머니 방의 물품들 그리고 장례식날 우리집 풍경입니다. 우리집은 기억자(ㄱ) 모양의 집이었고, 기억자의 세로획 부분에 할머니 방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방 마루 밑 돌발판에는 하얀 고무신이 항상 있었습니다. 할머니의 허리춤에는 동전과 사탕이 있어서 손자인 나에게 “우리 관호야!”라고 부르시며 사탕을 주셨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우리집 마당에 가운데 높은 폴대가 올라가 있는 하얀색 천막이 치어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할머니도 내 맘을 잘 아시고 그렇게 해주셨던 분입니다. 거론 안해도 어머니와 아버지야말로 최고로 당연히 ‘내 맘’을 알아주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글을 마칠 때 짧은 통화를 고장 휴대폰의 스피커폰으로 했는데, 그것을 들었는지 거실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던 집사람이 “목사님! 다 목사님(네) 맘 같은 줄 아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웃고 놀랐습니다. 이젠, ‘내 맘’이 좀 쉬어야 겠습니다. 

글 쓰기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맘을 정리하고 ‘내 맘’을 이제 좀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정을 소비하지 말고, 이젠 아예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음, 음, 음. ‘내 맘’아! 이젠 좀 쉬어야해. 소비하지 말고.”  

 

나관호 목사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문화평론가 및 칼럼니스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대표 소장 /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커뮤니케이션 및 대중문화 전문가' / 치매가족 멘토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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