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예배] “잃어버린 양, 동전, 아들을 찾는 기쁨” (눅15장)
[읽는 예배] “잃어버린 양, 동전, 아들을 찾는 기쁨” (눅15장)
  • 윤사무엘 목사
  • 승인 2023.06.0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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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다음 설교문과 예배자료는 2023년 6월 11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둘째 주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로이교회(인천 송도) 주일예배용입니다. 기도로 주님께 열납되는 주일예배를 준비합시다. 6월은 '호국의 달'로 지키며, 다음 예배 자료를 나눕니다. 샬롬샬롬!!! (로이교회 / 합동). 특히, 로이교회는 합정동교회(담임 김효성 목사)와 말씀사역을 협력하는 교회입니다. [뉴스제이는 한국교회를 위해 자료를 기꺼이 공유해 주시는 김효성 목사님과 윤사무엘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23) “잃어버린 양, 동전, 아들을 찾는 기쁨” (눅15장)
“Joy to find the lost sheep, coin and son” (Luke 15)

본문: 누가복음 15:1-32
요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눅 15:10)
주제: 하나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돌아오면 기쁘게 받아 주신다
교독문: 79번(요 15장), 예배의 부름: 호 2:14-15
찬송: 615장(통 없음), 15장 (55장), 527장(통 317장)

일자: 2023년 6월 11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둘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로이 교회 담임, 예장 합동, 평남노회)
  [예배시간: 매일새벽기도(월-금) 오전6시, 주일예배 오전 11시, 오후 1:30]

윤사무엘 목사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누가복음 15장을 강해합니다. 눅 14-15장은 전도를 위한 내용입니다. 지난 주일 주님께서 베푼 잔치자리에 사람을 강권하여서라도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을 받았고 오늘은 세가지 비유를 통하여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은 비유 The Parable of the Lost Sheep(눅 15:1-7)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불평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2절. 앞장 14장 시작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느 바리새인 집에 초청을 받아 가셨다가 수종병(dropsy) 걸린 여인이 동석해서 그 병을 고쳐주신 일로 안식일법에 대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바르게 해 주셨습니다. 여기 1-2절에서 세리외 죄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시는 것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불평했습니다. 왜냐하면 동족 유대인으로 당시 세리(publicans = tax collectors)는 로마 정부가 정하는 세금 이외 징수를 하여 부를 챙기는 이들이 많이 유대인들은 이들을 이방인 취급을 합니다. 또한 죄인들(sinners)이란 형사범들이라기 보다는 장로들이나 유대인의 유전과 전통을 지키지 않던 종교적 범법자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뜨겁게 환영하였습니다.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에게 가까이 나아와 말씀 듣기를 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불평하면서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수근거립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보다 자기들의 관습과 법을 더 존중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방인 같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불결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소외되고 미움을 받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과 교제하며 말씀을 전하시고 구원의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3-6절. 예수님께서는 불평하고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잃은 양, 잃은 은전(銀錢), 잃은 아들에 관한 세 가지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 비유들의 핵심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잃어버린 이웃이 회개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잃은 양의 비유를 살펴봅시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에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wilderness)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목자들이 백 마리 정도의 양은 이름을 정하고 다 외울 수 있었답니다. 토리, 제리, 타미, 등 한 마리 한 마리 이름을 불러주고, 양들은 자기의 목자의 목소리만 듣고 따라갑니다. 목자가 양들 가운데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번 계수를 했을 것입니다. 가량 토리라는 양이 보이지 않습니다.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를 광야에 두고 그 잃어버린 토리를 찾아 방금 왔던 길을 역행해서 가게 됩니다. 양은 목자가 인도하는대로 따라오기에 100마리가 지나가면 길이 생깁니다. 그래서 목자가 이 길만 따라가면 됩니다. 양은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하기에 일단 양떼를 떠나게 되면 꼼짝없이 그곳에 서서 기다립니다. 혹 어떤 구멍에 빠졌거나 언덕에 떨어진 경우도 그냥 기다리고 있습니다. 목자는 한 마리 양을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찾으러 다시 옵니다. 성실한 목자는 그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찾도록’(until he find it)이라는 원어(헤오스 휴레 아우토 ἕως εὕρῃ αὐτό)의 뜻은 찾을 때까지 끈질기게 찾아 마침내 찾았다는 뜻입니다. 목자는 혼자 외로이 있는 양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을 새롭게 찾을 때 “유레카”하며 기뻐합니다. 유레카(Eureka,  εὕρηκα)란 뜻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단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시대에 금의 무게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느냐는 왕명에 고민하고 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Ἀρχιμήδης, BC 287경~212년경)가 목욕탕에 들어갔을 때 물이 흘러넘치는 것을 보고 이렇게 금을 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너무 기뻐 맨몸으로 “유레카(나는 그것을 찾았네)” 외쳤다는 것입니다. 1974년 8월 13일부터 6일간 여의도 광장에서 CCC주관으로 열린 ‘엑스플로(Explo) 74’ 대회의 구호가 “나는 찾았네 I found” 였습니다. 지금 겟세마네 신학교에서 강의하시는 박호용 교수님의 저서 요한복음서의 부제가 <유레카 익튜스 요한복음>이라고 붙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으로 복음의 총결론을 정리한 책이라는 발견을 유레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찬송가 305장에서 John Newton목사님은 1779년 자신의 목회 40여년을 회고하면서 젊었을 때 아버지의 노예사냥과 선주의 일을 유산으로 이어받아 아프리카 노예들을 미국에 팔아먹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회심하고 이를 정리하여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간증한 찬송이 바로 Amazing Grace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한때는 잃었던 생명을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가 바로 유레카입니다. 나는 진리를 찾았네. 나는 비결을 찾았네, 나는 해법을 찾았네, 나는 사랑을 찾았네 등.

한 마리의 길을 잃은 양을 다시 발견했을 때 목자의 기쁨은 충만했습니다. 그는 너무 기뻐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서 친구들과 이웃들을 함께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기뻐해 주세요. 내가 잃어버린 내 양을 찾았습니다”하고 식사를 함께 했을 것입니다. 그 비용이 양 한 마리 보다 몇배가 되더라고 이 기쁨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7절.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원받은 모든 자들보다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2. 잃어버린 동전을 다시 찾는 기쁨 The Parable of the Lost Coin (눅 15:8-10)
(8) 어느 여인이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8-10절. 둘째로, 잃은 은전(銀錢)의 비유입니다. “어느 여인이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어느 여인이 애지중지한 10개의 드라크마 은으로 된 동전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로 로마 화폐인 데나리온과 같은 값으로 한 노동자가 하루에 벌 수 있는 품삯에 해당합니다. 요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0~12만원이랍니다. 이 비유에서 한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귀하게 여겼고 그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애써 마침내 찾았고 그때 그는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모아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1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회개하는 한 죄인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로 7절과 같은 내용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브라질에 세워진 예수님 상
브라질에 세워진 예수님 상

3.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
(11)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유산을 제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 살며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하게 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말하기를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저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1) 아들이 말하기를 ‘아버지여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4) 이 내 아들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으니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28) 그가 화를 내며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면한니

(29) 아버지께 대답하기를 ‘제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제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니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1-13절.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잃은 아들을 찾는 기쁨의 비유를 하십니다. 이 비유는 흔히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제게 돌아올 분깃을 제게 주소서.” 살아계시는 아버지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불효자입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넓으신지 이 요청을 받아 들이며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습니다. 당시 법으로 장자에게는 상속의 2/3를 증여하고, 나머지 1/3를 다른 자녀들과 나누는데 이 집은 두 아들 뿐이어서 둘째 아들이 받은 유산이 된 것입니다. 그런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은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환전해서 먼 나라에 갔고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허비하였습니다. 이 돈을 창기와 함께 놀았다는 말은 30절에 큰 아들이 홧김에 뱉은 말이었지 확인된 내용은 아닙니다.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낭비하였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 지혜와 재능, 시간과 건강과 재물을 허비하며 방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14-16절. 돈을 벌때는 힘이 들고 저축할 때도 시간이 많이 드나 소비할 때는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이 돈입니다. 둘째 아들은 그가 가진 재산을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비로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살았습니다. 집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했는데 돼지치는 것 보니 이곳은 이방 땅입니다. 그는 돼지 먹는 쥐엄 열매(husks, 완두콩처럼 생긴 것으로 씹어 먹으면 단맛이 남)로 배를 채우고자 했지만 그것조차도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17-19절. 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님,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저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원문(에이스 헤아우톤 데 엘쏜 εἰς ἑαυτὸν δὲ ἐλθὼν)은 ‘이에 정신이 들어’라는 뜻입니다. 

큰 흉년은 하나님의 재앙인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가난과 궁핍 속에서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를 합니다. 그는 그 궁핍을 통해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게 되었고 또 자신이 돼지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낮고 비천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 집이 부요하였음을 기억합니다. 또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는 자신이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아버지께 그렇게 고백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는 자신이 아들의 자격은 없고 일꾼의 한 사람으로 여겨달라고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절. 그 아들은 깨닫는 순간 바로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일어나서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깨달은 대로 행합니다. 바른 생각에서 바른 행동이 나옵니다. 회개는 자신의 죄와 불행을 바르게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일어나 죄악된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직도 거리(相距)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나타냅니다. 아버지는 그를 겨우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고 뜨겁게 맞아들였습니다. 

[21-22절] 자기를 환영하는 아버지에게 그 아들은 말하기를 “아버님,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고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는 아들의 뉘우침을 기쁘게 받았고 그를 아들로 인정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긴 것은 그를 종으로가 아니고 귀한 아들로 인정한다는 표시입니다. 아들의 자격을 포기했던 그에게 아들의 자격을 다시 준 것입니다. 

23-24절. 기쁨이 충만한 아버지는 또 말하기를 “또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다시 찾은 아들로 인해 너무 기쁘고 행복하여 이웃을 초청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기쁨의 이유는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이 마치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과 같고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25-32절.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음악소리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묻습니다. 종이 대답하기를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큰 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기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하자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기를 “제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제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저의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는,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아들은 충성스러운 태도를 지금까지 지켜왔습니다. 맏아들의 노한 마음은 이해할 만합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순종하며 성실히 여러 해를 보냈던 그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주어 그의 친구들과 즐기게 한 일이 없었고 근검절약하며 충실하게만 살았던 아버지께서 재산을 탕진한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은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불평에 대해 아버지는 자신의 기쁨이 정당하다고 말하십니다.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고 인간미가 적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가 맏아들을 위하지 않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목자가 양우리 안에 남아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여인이 주머니 속에 남아 있는 아홉 개의 은전을 미워하지 않았듯이, 아버지는 결코 맏아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아버지의 모든 소유는 큰아들의 것이었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현재의 기쁨은 잃었던 것 같은 둘째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기쁨인 것입니다. 

제가 하버드대학교 신학부에서 공부할 때 헨리 나우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 64세)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사제이자 신학자인데. 토머스 머튼, 렘브란트, 빈센트 반 고흐, 장 바니에 등의 영향 아래 자신의 전공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쳤으며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는 갑자기 1985년에 교수직을 사임하여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지적장애우 돌봄의 집인 라르쉬(L'Arche Daybreak Community)로 상담사 도우미로 가셨습니다. 나우웬은 1932년 네덜란드 네이케르크에서 태어나서 1950년 사제가 되기 위해 드리에베르겐 근처 리젠버그에 있는 가톨릭신학교로 옮겨서 6년간의 학위과정(2년은 철학, 4년은 신학)을 이수한 뒤 1957년 위트레헤트의 성 캐서린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이후 평생 위트레흐트 대교구의 사제로 남았다). 예일 대학교 신학 대학원에서 사목신학을 가르치게 되었으며 1982년 하버드 대학교 신학 대학원에 초빙을 받아 매해 6개월만 가르치고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일을 할 자유를 얻을 수 있기로 한 뒤 신학 교수로 임명받고 강의를 했답니다. 

1985년 장 바니에의 초대로 프랑스 트로슬리에 있는 라르쉬 공동체에서 1년간 생활을 하고 자신의 소명이 교수가 아닌 다른 곳에 있음을 깨닫고 1986년 캐나다 토론토 근처에 있는 라르쉬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영성지도자이자 사제로 활동했습니다. 1996년 64세의 나이로 네덜란드 힐베르쉼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사야 53:4-7 말씀을 근거로 1972년(1979년 개정)에 『상처 입은 치유자: 현대 사회의 사역』 (The Wounded Healer: Ministry in Comtemporary Society, New York: 최원준 옮김, 두란노, 2011.로 명성이 높아졌습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이 남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자신 찔림을 받고 매맞는 상처 입은 자가 되어야 함을 주장합니다. 

나우웬은 그가 별세한지 6년후인 2012년에 출판된 <탕자의 귀환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은 그의 유고작이며 또한 대표작품이 됩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를 고스란히 화폭에 옮긴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화가)가 1661–1669년 사이에 그린 대작(1.8미터×2.4미터, 유화물감)에 담은 것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에르미타주에 위치한 Hermitage Museum 1층 복도에 전시된 그림에서 영감을 얻은 헨리 나우웬은 작은 아들의 방탕한 삶과 귀환, 큰 아들의 깊은 상실감과 분노, 아버지의 용서와 환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깊이 성찰한 저서입니다. 그는 이 그림을 1983년에 처음으로 접하게 됐습니다. 당시 그는 중앙아메리카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을 종식시키지 위해 크리스천 공동체들이 무엇이든 힘닿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누비는 고단한 순회강연을 마치고 바로 프랑스 트로슬리에 있는, 지적 장애를 가진 이들에게 따듯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라르쉬(L'Arche) 공동체에서 몇 달 머물고 있었습니다. 

공동체 안에 있던 친구의 사무실을 방문했다가 방문에 붙여놓은 커다란 포스터 <탕자의 귀환>(포이에마)을 발견하고는 그 그림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뜨거운 친밀감, 붉은 망토의 온화한 톤, 소년의 겉옷에서 반사되는 황금빛, 그리고 양쪽을 한꺼번에 휘감고 있는 신비로운 광채에 빨려들어 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년 후, 러시아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작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삼일 동안 매일 이 그림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바라봤습니다. 그림 앞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었던 나우웬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림 속 등장인물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음미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각각의 인물이 담고 있는 의미들을 렘브란트와 자신의 삶을 투영시켜 정밀하게 해석해 책에 옮겼습니다. 

하루는 자신을 맏아들 투영하며, 다음 날에는 돌아온 아들에 투영하며, 마지막 날에는 아버지에 투영하며 자신을 성찰해 본 느낌을 그대로 저술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모두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론을 내립니다.렘브란트가 그린 아버지를 찬찬히 살펴보면, 아버지의 오른손은 남성의 손(부성애), 왼손은 엄마의 손(모성애)입니다. 슬픔과 용서, 너그러운 마음 등 참으로 인정 넘치는 아버지가 되는 세 가지 길이 눈에 들어 옵니다. 슬픔은 기도입니다. 하늘 아버지처럼 되려면 끊임없이 용서해야 하며 그 용서는 무조건입니다. 너그러움은 기밀한 유대에서 비롯된 베품을 의미하며 신뢰할만한 가족을 창출해 냅니다라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으로 마음을 깨끗이 비워낼 때마다 하늘과 땅이 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큰 기쁨의 샘물이 솟아납니다. 아들 딸들이 돌아온 데서 비롯된 환희입니다. 영적인 아버지만이 맛볼 수 잇는 희열입니다.”라고 하면서 특히 '오직 은총을 베푸는, 가진 것을 다 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손입니다'라면서 성찰의 포용력을 보여준다. 이제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15:20)”

ㅇ 현대인들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 방황하고 있습니다. 중동된 인생은 한 마디로 '먼 지방'에서 사는 삶입니다. 구원을 갈구하는 부르짖음이 일어나는 지점이 바로 그 곳입니다
ㅇ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진짜 외로움이 밀려드는 법입니다

ㅇ 아버지의 품에 안긴 청년은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간 인류 전체를 상징합니다. 탕자의 상한 몸은 인류의 상한 몸이 되었습니다. 되졸아온 청년의 어린아이 같은 얼굴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며 실락원에 다시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모든 이들의 얼굴이 되었습니다

ㅇ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의 참된 중심은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가장 밝은 빛이 그 위를 비추고 있습니다. 구경꾼들의 시선도 거기에 쏠렸습니다. 그 안에서 자비로운 사랑이 구현되었습니다. 거기서 용서와 화해, 치유가 일어납니다. 탈진한 아들뿐만 아니라 지친 아버지도 두 손을 통해 안식을 얻습니다

ㅇ 아버지의 손은 부여잡고 어머니의 손은 쓰다듭습니다. 아버지는 확신을, 어머니는 위안을 줍니다. 아버지는 남성성과 여성성, 부성과 모성을 두루 가진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ㅇ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아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자식이 돌아올 때마다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깨닫는다면 삶의 고뇌는 줄어들고 하늘 아버지를 향한 신뢰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ㅇ 집에서 본래의 신분을 되찾고 새 출발하라는 아버지의 초대를 받고 돌아온 자녀가 이제 감당해야 할 도전은 스스로 하늘 아버지처럼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은 주인이 기뻐하여 그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기려 했듯이, 잃은 은전을 찾은 여인이 기뻐하여 그 친구들과 이웃들을 불러 함께 즐기려 했듯이, 또 잃은 아들을 다시 얻은 아버지가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었듯이, 죄인 한 명이 회개하고 구원받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천사들에게 큰 기쁨이 됩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명의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매우 기뻐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한 명의 영과 혼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양의 주인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려 두루 다닙니다. 또 은전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은 그것을 찾을 때까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날마다 기다렸다고 보입니다. 그는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도 부지런히 전도하여 하나님께 이런 기쁨을 드립시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호국의 달을 맞이하여 대한민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도 전도에 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라도 주님의 집을 채우게 하시며, 잃어버린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주님의 품에 돌아오면 하늘의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부지런히 전도하여 주님의 교회를 채우게 하시며 길을 잃고 헤매는 양, 동전, 아들을 찾아 주님의 교회로 따뜻하게 영접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양 한 마리와 들에 있던 아흔 아홉 마리 양 비교
2. 잃은 양을 찾으러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나누어보자
3. 잃은 한 드라크마를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4.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을 나누기 위해 이웃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임
5. 내가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라면 어떻게 할까?
6. 내가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라는 어떻게 할까?
7. 맏아들처럼 섭섭한 마음을 가졌다가 아버지의 말씀에 위로받음은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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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호국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매일 주님의 겸손과 온유, 순종을 배우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6월 12일 월 찬 255장(통 187) 요계 19 어린 양의 혼인 잔치
    13일 화 찬 532장(통 323) 요계 20 천년 왕국 후 사탄의 패망
    14일 수 찬 534장(통 324) 요계 21 새 하늘과 새 땅
    15일 목 찬 531장(통 321) 요계 22 광명한 새벽별
    16일 금 찬 528장(통 318) 창 1  빛이 있으라
    17일 토 찬 526장(통 316장) 창 2 인간창조와 에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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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6시부터) (Zoom으로 동시 중계)
us06web.zoom.us/j/7049077483?pwd=UzNvdldBM04xMFlWQSswVWxDT3YvQT09,  회의 ID: 704 907 7483 / 암호: 1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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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신학교 Gethsemane Mission Seminary▣

◉2023년도 가을학기 개강(2023년 8월 28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종강(2023년 11월 27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장소: 수원 향기나는나무교회(이태환 목사 시무), 본당과 디모데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네이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연락처: 010-3288-2878, 010-9367-7605, 010-9113-1127
◉로이교회 후원계좌: 농협 302 0280 1002 11 YunSam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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