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읽는 예배]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눅14장)
[영상&읽는 예배]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눅14장)
  • 윤사무엘 목사
  • 승인 2023.06.02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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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다음 설교문과 예배자료는 2023년 6월 4일 주일 (삼위일체 주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로이교회(인천 송도) 주일예배용입니다. 기도로 주님께 열납되는 주일예배를 준비합시다. 6월은 '호국의 달'로 지키며, 다음 예배 자료를 나눕니다. 샬롬샬롬!!! (로이교회 / 합동). 특히, 로이교회는 합정동교회(담임 김효성 목사)와 말씀사역을 협력하는 교회입니다. [뉴스제이는 한국교회를 위해 자료를 기꺼이 공유해 주시는 김효성 목사님과 윤사무엘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22)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눅14장)
   “Compel them to come in, that my house may be filled” (Lk14)

본문: 누가복음 14:1-35
요절: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눅 14:23)
주제: 천국 잔치자리에 사람들을 강권하여 주님의 집을 채우시기를 원하신다
교독문: 137번(삼위일체), 예배의 부름: 민 6:24-36
찬송: 10장(통 34장), 15장 (55장), 505장(통 268장)

일자: 2023년 6월 4일 주일 (삼위일체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로이 장로교회 담임)  
  [예배시간: 매일새벽기도(월-금) 오전6시, 주일예배 오전 11시, 오후 1:30]
 

윤사무엘 목사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로 성수합니다. 지난 주일 성신강림절 후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이라고 합니다. 공교회에서 채택한 찬송가의 마지막 교독문이 삼위일체(137번)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주일은 교회력 중에서 별로 기억되지 않는 주일입니다. 성탄절[성육신날]과 그 이전의 대림절, 부활절과 그 이전의 사순절 그리고 성령[성신]강림절이 잘 기억되고 지켜지는 반면에 삼위일체주일은 잘 기억되지 않습니다. 

성령[성신]강림후 첫주일을 우리의 선배들은 삼위일체 주일로 지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이 성령[성신님]받고 세상에 파송될 때에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밝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 기도의 대상은 인격적인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예수님, 인도자 성령님 즉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과 기도의 대상입니다. 세 인격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구약 쉐마에서 고백한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이십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 Τριάδος Trinity)란 하나님은 본질에서 한 분이시며 위격(位格, ὑπόστασις)에서는 세 인격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방교회는 본질에 한 분이신 하나님께서 세 위격으로 되는 신비를 지지했고, 서방교회는 세 위격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이 동일본질로 한 분 하나님이 되는 신비를 지지합니다. 초대교회부터 한분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버지(Pater)와 아들(Filius)과 성신(Spiritus Sanctus)은 동일한 인격이 아니나(non est) 한분 하나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이미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났고, 신약성경에서는 여러 곳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성신]이라는 문구가 증거되었으나 신학적으로 정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기독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의 초기 기원은 그리스도론(기독론)의 확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막 태동되었던 기독교에게 70년 유대 전쟁에서 다른 유파가 사라지고 유일하게 남은 바리새파 유대교와 인성을 강조하는 에비온주의, 신성의 영적 요소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등장으로 기독교 뿌리를 흔든 자극이 되었고, 육체를 가지신 제2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논리적인 설명인 신학이론이 필요했습니다. 이 즈음에 형성된 신약성경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론과 그 그리스도론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인 삼위일체가 등장하였습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은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변증적 이유로 가톨릭 교회에서 어거스틴 중심으로 교리로 확립하였고 16세기 교회개혁때에 이 삼위일체를 대체로 수용하여 이 세상을 설명하는 세계관과 신학적 지침으로서 기독교에 중요한 교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신론으로 오해되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여호와의 증인, 예수그리스도 말일성도(몰몬교), 유니테리언에서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습니다. 

유니테리언주의(Unitarianism)는 18세기 등장한, 이신론(理神論 deism, 일반 성경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고 계시(啓示)를 부정하거나 그 역할을 현저히 후퇴시켜 기독교의 신앙 내용을 오로지 이성적인 진리에 한정시킨 합리주의 신학의 종교관)의 영향을 받은 반삼위일체론 계통의 기독교 신앙으로 칼빈주의 이중예정설에 반대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유일신 신앙 즉, 단일신론(Unitheolism)을 주장합니다. 성자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분으로 믿습니다.

여호와의증인(Jehovah’s Witness)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일체가 아니고 각각의 세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고 창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1830년 Joseph Smith가 시작한 몰몬교(Mormon, 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는 니케아 신조에 나타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세 인격을 믿지만, 성 삼위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믿는 삼위일체론을 인정하지 않고, 과거에 하나님이 한 분이고 시대에 따라 성부, 성자, 성신으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양태론 삼위일체를 신봉합니다. 성자와 성신이 성부에 종속되어 있어서 한 하나님이라는 종속주의 삼위일체론을 믿습니다. 

양태론(樣態論, Modalism, 양태론적 단일신론의 준말)은 양식론(樣式論)이라고도 불리는데, 전통적 유일신 신앙(단일신론)은 고수하면서 삼위일체를 설명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이단 이론을 말합니다. 노에투스(Noetus of Smyrna, 200?-225)와 프락세아스, 3세기 사벨리우스, 이 세 사람의 공통적 요소를 말하려고 도입한 단어였습니다. 양태론자들은 하나님은 한분이시고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을 가졌으므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즉 한분 하나님께서 모양만 성부, 성자, 성령의 다른 형식(forms)으로 나타났다는 주장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령의 인격은 사라지고 단일한 신격만 남게 되어 이단 사상이 되어 버립니다. 전형적인 양태론은 같은 하나님이 창조 시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구속에는 성자 하나님으로, 성화 때는 성령 하나님으로 활동한다고 봅니다. 즉 양태론은 교회의 정통적 삼위일체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히폴리투스(170?-236?)에 의하면 ‘성부가 친히 성육신하시어 그리스도가 되어 고난받고 죽었다가 스스로 부활했다’는 성부수난설(聖父受難說, Patripassianism)을 주장하여 최초의 양태론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정통기독교에서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은 삼위(3 Persons, 세 위격, 세 신격, 세 분, 三位)로 존재하지만, 본질(essence)은 한 분 하나님이라는 교리입니다.(엡 4:4-6, 빌 2:4-5) AD 200년경 라틴 신학자인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가 트리니타스(trinitas)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고 그후 니케아 신조와 사도신경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삼위일체의 '예고편'이 있는데, 아브라함 족장을 방문한 '사람 셋'은 '주'라고도 지칭하며, 이사야가 소명받을 때 스랍들의 찬송이 ‘성호 삼참’(사 6:3)입니다. 시편 2:7, 110:1, 4의 말씀에도 하나님의 삼위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삼위일체론이 발달한 흔적이 마 28:19, 고후 13:13, 요일 5:7(킹제임스에 나오는 번역)에 나옵니다. 그러나 2000년 교리사에서 삼위일체 논쟁이 뜨거웠던 만큼 여전히 혼란스럽고 애매모호한 가르침이 많이 나돌아 다닙니다.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이 많이 퍼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 즉 신비한 실체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한분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찬송하며 영광을 돌립시다. 저는 삼위일신(三位一神)이란 용어도 좋아합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누가복음 14장을 강해합니다. 천국 잔치 비유에서 주인은 내 집을 채우라고 종들에게 명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예배당을 가득 채우도록 전도에 집중합시다.

영화 '예수혁명'의 한장면
영화 '예수혁명'의 한장면

1. 안식일에 환우를 고치심 Healing of a Man on the Sabbath (눅 14:1-6)
(1)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 하시러 들어가시니 그들이 엿보고 있더라(2) 주님의 앞에 고창병(dropsy)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3)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4) 그들이 잠잠하거늘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5)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6) 그들이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1절.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한 지도자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바리새인의 식사 초대를 사양하지 않으시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식사초대보다 안식일에 금기 사항을 준수하는지 살펴보는 태도입니다. ‘엿보다’는 원어(파라테레오의 현재분사형 파라테루메노이 παρατηρούμενοι)는 ‘자세히 살펴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일부 바리새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고 협력하는 마음 대신에, 흠을 찾아 비평하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2-4절. 주님 앞에 고창병(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일부러 이런 환우를 데려다 놓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치시는지 엿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고창병(dropsy)은 수종(水腫) 혹은 부종(浮腫)이라고 하는데 몸이 붓는 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시자 그들이 잠잠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 환우를 데려다가 고치시고 보내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핀대로 눅 13장에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18년 동안 마귀들려 몸이 펴지 못하던 환우를 고쳐주셨습니다(눅 13:15-16). 안식일은 회복의 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회복하며, 사람과 자연 사이도 회복되는 날로 환우들이 병마에서 회복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5-6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이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함을 그렇게 표현하셨습니다. 

2. 천국을 혼인잔치와 큰 잔치에 비유하심 The Parable of the Wedding Feast and Great Banquet (눅 14:7-24)
(7) 초청함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 높은 좌석을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초청함을 받은 경우에(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10) 초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또 자기를 초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초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장애우들과 신체장애우들과 시각장애자들을 초청하라(14)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5)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17) 잔치할 시간에 그 초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말씀드리기를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니(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말하기를 “나는 밭을 샀으니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19) 또 하나는 말하기를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20) 또 하나는 말하기를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장애우들과 시각장애우들과 신체장애우들을 데려오라” 하니라(22) 종이 말하기를 “주인님,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초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7-11절. 또 예수님께서는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상석(上席) 택함을 보시고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초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上座)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너와 저를 초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末席)으로 가게 되리라. 초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초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주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석에 앉으려 하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교훈하십니다. 

잠언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이 앞잡이니라” 잠언 18:12 “사랑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말석에 앉아 있으면 대접을 받고, 상석에 앉아 있으면 창피를 당할 수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겸손은 성도의 매우 중요한 덕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합니다(벧전 5:6). 

12절.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청한 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나 부(富)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초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사람이 선을 베푼 후 상대방에게서 그것의 갚음을 받으면 먼저 베푼 선이 더 이상 칭찬과 상을 받을 선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계산없는 대접이 더 가치가 있고 소중합니다. 

13-14절.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장애우들과 신체장애우들과 시각장애우들을 초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우리는 되돌림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단순히 베푸는 생활을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 의인들의 부활의 날이 있는데, 그 날에 하나님께로부터 칭찬과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눅 12:33-34).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갚아 주실 것입니다(잠 19:17). 내세에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믿고 하나님의 보응과 보상을 바라볼 때, 사람은 세상에서 바르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갈 6:9-10).

15-17절. 함께 먹던 사람들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빵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 식사 자리에서도 그분의 관심은 단지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준비하여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시며 그가 베푼 ‘큰 잔치’는 예배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세상에 사는 모든 이방인들도 초청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습니다. 그것은 성도들 간의 교제이며 특히 성찬 교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그 잔치에 초청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그 초청한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말하기를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주인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꾼으로 본문에 4번 언급된(17, 21, 22, 23절) ‘종’은 교회의 제직을 말하며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말합니다. 

18-20절. 그런데 초청을 받은 자들은 다 한결같이 사양했습니다. 하나는, “나는 밭을 샀으매 부득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했고, 또 하나는, “나는 소 다섯 겨리(즉, 열 마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했고, 또 하나는,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고 핑계를 댑니다. 그들의 핑계거리는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일들입니다. 그러나 잔치에 초청을 받았던 그들은 먼저 그 잔치에 참여하여야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일들을 앞세우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마 6:33). 우선 순위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안식일 계명이나 십일조 계명의 정신입니다. 성도는 7일 중 하루를 안식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6일을 자신의 일들에 쓰며,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 10분의 9를 자신의 일들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은 그 주인을 무시하고 자신의 일을 하는데 열중합니다. 그들이 그 잔치에 참석한다고 해서 밭의 일을 하지 못하거나 소를 시험하지 못하거나 결혼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그 초청을 무시합니다. 성도들은 십일조 헌금을 내기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십일조 헌금에는 풍성한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말 3:10). 

21절.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자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말하기를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장애우들과 시각장애우들과 신체장애우들을 데려오라.” 이것은 우리의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 육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들을 다 데려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고 육신적으로 병약한 자들이 먼저 교회로 인도함을 받고 먼저 천국의 복을 받게 하십니다. 

22-24절. 종이 보고하기를 “주인님,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말하기를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초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산울가’라는 원어(프라그모스)는 ‘산울타리 가의 길’을 말합니다. 여기의 ‘내 집’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그것은 현재 신약교회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저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열심히 전도하고 사람들을 강권함으로 됩니다. 잔치 자리에 오는 것은 바로 회개와 믿음과 순종을 가리킵니다. 처음 잔치 초청을 거절하였던 사람들은 그 잔치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빼앗길 것입니다. 우리 로이교회에도 송도 주민들과 이웃 친척들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웁시다. 이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3. 주님의 제자가 되는 길 The Cost of Discipleship (눅 14:25-35)
(25) 무수한 무리가 함께 갈때 예수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만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30) 말하기를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32) 만일 못할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25-27절.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과 함께 갈 때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말씀하시기를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제자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단순히 성도가 되는 것 이상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에 대한 좋은 실례는 나오미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룻이 고국에 남지 않고 끝까지 시모를 따라 이스라엘로 출발할 때 한 결심에 나옵니다(룻 1:16). 1) 어머니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2) 어머니의 나라가 저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3)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가겠습니다 4)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5)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것에 저도 죽겠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가족들을 미워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른 곳에서 가족을 사랑해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본문에서 ‘미워한다’는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가족에 대한 의무가 충돌하거나 하나님의 명령과 가족의 명령이 충돌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택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고 우리 목숨이 위협 당하는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신앙의 정절과 절개를 지켜야 합니다. 

28-30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사람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먼저 그 비용을 예산하여 그 일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 시작해야지, 그런 검토가 없이 그냥 시작하면 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중도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며 사람들의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준비와 예비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31-32절.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서 저 이만 명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철저하게 전략을 세우고 자신의 군사력이 상대방보다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처음부터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사신을 보내어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 해야 합니다.  

33절.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위의 두 비유가 암시하는 바는,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망대를 건립하는 것과 다른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비유되었고, 건축비용을 예산하는 것과 전투력을 비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모든 소유를 가지고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영생을 위해서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가진 것으론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우리의 가진 것과 힘으로는 불가능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부정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버리면 얻는다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일시적 세상을 버리면 영원한 천국을 얻으며,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리면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을 영원한 영광의 세계의 행복을 얻습니다. 사랑은 버리는 것입니다.

34-35절.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소금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유하며,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것은 그들이 성도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이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초월하지 못하고 세상에 얽매이고 자기 욕심에 얽매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소금 맛에는 혀로 느끼는 다섯 맛(짠 鹽, 쓴 苦, 신 酸, 단 甘, 매운 辛)을 오미(五味)라고 하는데, 성도들도 이런 믿음의 맛이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는 맛 잃은 소금 같은 교인이 되지 말고 맛을 제대로 내는 성도가 됩시다.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치 맙시다. 우리는 세상 일들이 바쁘다고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초청을 해야 하고 또 사람들을 강권하여 교회를 채워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교회를 채우는 것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초청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언제까지 연연하지 말고 우리의 초청 대상을 변경하고 확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특히 우리 주위에 가난한 자들이나 병약한 자들을 교회로 초청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다른 동네에 있는 사람들도 누구든지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채워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 나오는 무리 중에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자기 가족들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아니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를 하고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의 기도]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일체 하나님,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준비에 최선을 다하며 매주 매번 주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드리게 하옵소서. 이번 호국의 달에 더욱 조국 대한민국의 안보와 성장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한국 교회가 종말의 사명인 세계복음을 감당하며 온 성도들이 언행일치하며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는 천국의 화원이 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주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가셔서 하신 일은?
2. 잔치에 초청받았을 때 우리는 어떤 자리에 앉아야 하나?
3. 큰 잔치 비유에서 잔치 참석을 거부한 사람들의 핑계는?
4. 큰 잔치의 빈 자리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5. 제자가 되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6. 소금 맛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할 행동에 대해 나누자
7. 우리교회가 “내 집을 채우라” 명령에 어떻게 순종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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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호국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매일 주님의 겸손과 온유, 순종을 배우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6월 5일 월 찬 8장(통 9장)   요계 13 짐승 두 마리
    6일 화 찬 9장(통 53장)  요계 14 144,000명이 부르는 노래
    7일 수 찬 10장(통 34장) 요계 15 마지막 재앙을 가지고 온 천사
    8일 목 찬 12장(통 22장) 요계 16 진노의 일곱 대접
    9일 금 찬 14장(통 30장) 요계 17 큰 음녀에게 내릴 심판
   10일 토 찬 15장(통 55장) 요계 18 바벨론의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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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6시부터) (Zoom으로 동시 중계)
us06web.zoom.us/j/7049077483?pwd=UzNvdldBM04xMFlWQSswVWxDT3YvQT09,  회의 ID: 704 907 7483 / 암호: 1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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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신학교 Gethsemane Mission Seminary

◉2023년도 가을학기 개강(2023년 8월 28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종강(2023년 11월 27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장소: 수원 향기나는나무교회(이태환 목사 시무), 본당과 디모데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네이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연락처: 010-3288-2878, 010-9367-7605, 010-9113-1127
◉로이교회 후원계좌: 농협 302 0280 1002 11 YunSam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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