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예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눅5장)  
[읽는 예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눅5장)  
  • 윤사무엘 목사
  • 승인 2023.03.31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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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다음 설교문과 예배자료는 2023년 4월 2일 주일 (종려 주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로이교회(인천 송도) 주일예배용입니다. 기도로 주님께 열납되는 주일예배를 준비합시다. 3월은 '기도의 달'로 지키며, 다음 예배 자료를 나눕니다. 샬롬샬롬!!! (로이교회 / 합동)

여호와는 나의 목자(13):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눅5장)  
     “Launch out into the deep, and let down your nets” (Luke5)

본문: 누가복음 5:1-39
요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4) 
주제: 베드로가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니라.
교독문: 129번(종려주일), 예배의 부름: 시 118:24-26
찬송: 102장(통 107장), 38장 (통 없음), 141장(통 141장)

일자: 2023년 4월 2일 주일 (종려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로이교회)  
      인천광역시 연수구 센트럴로 263, IBS Tower, 11층 11호 
  [예배시간: 매일새벽기도(월-금) 오전6시, 주일예배 오전 11시, 오후 1:3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나무란 이스라엘에서 자라는 야자수나무(palm tree)인데 대추야자(date palm) 열매를 맺는 나무로 중국에서 성경이 번역이 될 때 이와 비슷한 야자과의 상록수 품종인 종려나무로 번역하여 한국 성경에도 종려나무 가지로 소개되었답니다.

코로나가 시작될 때인 2020년 2월 10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Parasite)'이 칸 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이 이름이 더 유명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대추야자는 칸(프랑스 동남부 알프마리팀 주의 도시 Cannes)에서 많이 자라는 야자수로, 도시의 문장(紋章)에도 들어가 있는 칸의 상징입니다. 대추 야자나무는 이스라엘에서 키부츠마다 잘 자라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고 황금문으로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대추야자 가지를 흔들며 메시야로 환영했습니다.

대추야자수는 15미터 이상으로 자라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나무는 아니고 나이테가 없는 풀(plant)이라고 합니다. 대추야자는 사과보다 당분이 5배 많이 말려서 사막 여행하면서 식량이나 간식으로 먹습니다. 빵과 함께 먹습니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야자나무를 생명의 나무라고 부릅니다. 2005년 이스라엘의 한 고고학자가 유적지에서 발굴한 2000년 전의 대추야자 씨앗의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답니다. 1500년 전에 멸종됐다고 알려졌던 품종인데 이런 놀라운 생명력 덕분에 '신의 열매'라는 별명도 있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무리 지으시면서 유월절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으로 올라가십니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벳바게와 베다니 사이에서 제자 둘을 마을에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못한 나귀 새끼를 끌고온 것을 타시니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치고 예수님께서 타십니다(슥 9:9). 이 나귀가 가는 길에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더니 기드론 계곡을 건널때부터 큰 무리가 기뻐하며 야자수 나무잎(손같이 생김)을 들고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하며 환영했습니다(눅 19:29-38). “호산나(Hosanna = Hosianna, הושענה)”의 뜻은 히브리어로 “저를 구원하소서”(Save me!)입니다(시 118:25). 구원에 대한 요청하는 말입니다. 또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귀환하는 왕이나 장군들을 환영할 때 쓰던 말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여"(막 11.9),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막 11.10),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마 21:9)으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우리 교회, 우리 가정, 우리의 마음에도 주님 오시옵소서, 호산나 찬송을 부릅시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누가복음 5장을 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 제자들을 부르시고 나병 환자들, 중풍병자들을 비롯한 많은 환우들을 고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신 내용입니다.

1. 베드로를 제자삼으심 Jesus Calls the First Disciple (눅 5:1-11)
(1) 사람들이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니 예수님은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3)예수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라.”(5)시몬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6)그렇게 하니 물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니 잠기게 되었더라(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기를 “주님,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물고기 잡힌 것 때문에 놀라고(10)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시기를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사로 잡으리라” 하시니(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니라”

1-11절. 본문은 마태복음 4:18-22이나 마가복음 1:16-20의 내용과 동일한 사건을 증거합니다. 이 둘 사이에 차이점들도 있어 보이지만, 그것들은 부분적 생략과 대략적 묘사나 자세한 묘사에서 생긴 것이며 그 두 증거는 서로 보완적이라고 봅니다.

1-2절.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에 몰려와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며 우리에게 무궁한 생명과 평안을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 그에게 모여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십니다.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호수의 다른 한 명칭입니다. 주님께서는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고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숫가에 많은 배들이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시몬 베드로의 배와 야고보와 요한의 배에 두셨습니다. 그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들은 밤새 물고기를 잡고 아침에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전에 시몬 베드로가 아침까지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연극 '예수' 중에서

3절.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이 시몬은 8절에 시몬 베드로라고 언급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배에 앉으셔서 모인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시몬의 배는 강단이 되었고 호숫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청중이 되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앉아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4-5절.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시몬은 대답하기를 “선생님, 우리들이 밤새도록 고생을 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제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요한복음 1:41-42에 보면, 시몬은 형제 안드레의 인도를 받아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게바(베드로)라는 이름까지 받았습니다. 시몬은 밤새도록 헛수고를 했던 터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그의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해 보려는 마음도 생긴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6-7절. 시몬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으로 배를 저어 가서 그물을 던지자 물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습니다. ‘찢어지다’는 원어(디에레그뉘토 διερρήγνυτο 미완료과거시제)는 ‘찢어지고 있다, 찢어지기 시작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을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와서 두 배에 채우자 배가 잠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8-11절. 시몬 베드로는 이를 보고 해변가에 도착하여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말하기를, “주님, 저를 떠나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물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님’(에피스타타 ἐπιστάτα)라고 불렀던 그는 지금 그분의 무릎 아래 엎드려 두려워 떨며 그분을 ‘주님’(퀴리에 Κύριε)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확실히 변화된 호칭입니다. ‘주’라는 호칭은 단순한 존칭어인 ‘선생’이라는 호칭의 뜻을 넘어서서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하는 뜻을 가졌다고 보입니다. 또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본 자마다 시몬 베드로처럼 그 앞에서 두려워 떨며 피하려 할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와 친밀하게 일대일로 말씀하셨으나 그분의 관심은 시몬에게만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시몬의 동업자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사건에 참여하여 자신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그들은 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영광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들은 다 이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사로 잡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많은 물고기가 잡히게 하신 것은 단지 자신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시려 함이 아니라,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을 다 그분의 제자로 삼기 위함이셨습니다. 과연 시몬 베드로와 그분의 동료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목적과 관심은 그들을 제자로 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보았고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들(시몬과 그 동료들)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즉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증거합니다(마 4:20, 22). 예수님을 따르려는 전임(專任)전도자들은 이 처음 제자들의 행동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의 것을 구하는 길과 다릅니다. 세상의 것을 구하는 자는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자는 누구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전임전도자뿐 아니라 우리 모든 신자들도 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마 6:24), 또 자기의 가족과 자기의 소유와 자기 자신까지 다 버리지 않고는 그분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눅 14:26-27, 33). 우리는 결국 세상과 천국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허락과 복 주심 속에서 세상의 것들을 누리기도 하지만,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이 시드는 허무한 세상임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훨씬 귀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2. 나병 환자를 고치심 Jesus cleanses a leper (눅 5:12-16)
(12)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를 보고 엎드려 구하기를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13)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14) 예수님께서 그를 경계하시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니 매우 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니(16)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2절.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나병, 한센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구하였습니다. 그는 ‘온몸에 나병이 들린’ 자입니다. 나병은 미생물에 기인한 만성적 전염병으로서 궤양, 결핵성 혹, 손가락과 발가락의 상실, 신경의 마비 등의 특징을 가진다고 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는 사람들이 거하는 진 밖에서 따로 살아야 했습니다(레 13:45-46). 그러나 그는 자기를 고쳐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사야 55:6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주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나 예수님께서 그의 나병을 고쳐주실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그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환우들을 고쳐주신 사건들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사건을 보았거나 들음으로써 생겼을 것입니다. 성경 시대의 기적들은 당대와 후대의 구원 얻을 자들의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여하튼 이 나병 환자에게는 놀라운 믿음이 있었고 그는 믿음으로 그의 소원을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13절. 예수님께서는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기 위해 그 동네에 들어오셔서 얼마 동안 거기에 머무셨던 것 같습니다. 그는 즉시 그 나병 환자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보통 사람은 나병이 자기에게 옮길까봐 나병 환자의 몸에 손을 대지 않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touch, 합토). 그것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내며 사람의 질병들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때 나병이 곧 그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그의 신적 능력을 나타내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합니다. 그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만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병을 치료하실 수 있습니다. 

14절. 예수님께서는 그를 경계하시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증거하라”고 하십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은 병고침 받은 사실을 선전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실 주된 임무가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환우들을 고쳐주셨지만, 병고치시는 사역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구약의 율법을 존중하셨는지를 보입니다. 레위기 14장에 보면, 나병 환자는 병이 나으면 제사장에게 가서 그 몸을 보여 확인을 받고 깨끗한 새 두 마리로 정결 의식을 행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어린 숫양 하나로 속건제를, 다른 어린 숫양 하나로 속죄제를, 또 어린 암양 하나로 번제를 소제와 함께 드려야 했습니다. 이것은 나병 환자가 이스라엘 사회에 용납되기 위한 절차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로 하여금 자기의 병나음이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으로 되어졌음을 깨달아 하나님께 감사케 하는 뜻이 있었다고 봅니다. 

15-16절. 예수님의 소문이 더욱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왔으나 예수님께서는 물러가셔서 한적한 곳(wilderness)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분명히 병을 고치는 데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세상적 명예나 인기를 구하는 분도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을 대속 제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인들의 구세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사람들을 떠나 물러가셨고 조용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의 기도 생활은 모든 신자들에게 본이 됩니다. 우리는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시때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가 주시는 힘을 얻어야 합니다.

3. 중풍병자를 고쳐주심 Jesus Heals a Paralytic.(눅 5:17-26)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더라.(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대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19) 많은 사람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환우를 침상째 많은 사람 가운데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니(20) 예수님께서 그들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감히 죄를 사하겠느냐?”(22) 예수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시기를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대를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오늘날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17절.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앉아 있었고 [그들의](전통본문) 병을 고치는 주님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였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네 종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분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요, 둘째는 그분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구도자들이요, 셋째는 구경꾼들이요, 넷째는 그분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도 그런 네 종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 가운데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기도와 경건한 보수 신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교법사’라는 원어(노모디다스칼로스 νομοδιδάσκαλοs)는 ‘율법 선생’이라는 뜻으로 성경에 사용된 ‘율법사’(노미코스 νομικοs)나 ‘서기관’(그람마튜스 γραμματουs)과 동의어입니다. 교법사들(doctors of the law)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선생들입니다.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교법사들은 그분에게서 무슨 비난거리를 찾으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경건과 바른 지식과 건전한 인품을 겸비한 지도자들은 보기 드뭅니다. 경건 없는 지식은 사람을 교만케 하고, 바른 지식 없는 경건은 시대의 잘못된 풍조에 쉽게 넘어집니다. 참된 경건과 분별력 있는 바른 지식에 겸손하고 온유하고 선하고 진실한 인품을 갖춘 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좋은 일꾼과 지도자일 것입니다. 

18-19절.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대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사람이 너무 많아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했습니다. 중풍병은 몸의 일부 혹은 전부가 마비되는 병입니다. 사람들이 그를 ‘침대’에 메고 온 것을 보면 그는 전신 마비의 환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가복음에는 네 명의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막 2:1-12). 그들이 예수께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로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환우를 데리고 온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지붕(야자수 나무)을 벗기고 환우를 침대째 운집한 사람들 위로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집 구조는 가운데 뜰이 있고 그 주위로 방들이 있고 뜰 지붕은 천이나 야자수 나무가지의 지붕으로 되어 있고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의 가운데 뜰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고 그들은 외부 계단을 사용해 지붕으로 올라가 가운데 뜰 위의 지붕을 벗기고 예수님 앞으로 그 환우를 달아 내렸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용기가 있었고 친구에 대한 사랑과 수고가 있었고 또 서로 간의 협력이 있었습니다.

20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그 환우를 데려왔던 네 명의 친구들을 가리킵니다. 아니, 거기에 그 환우도 포함시켜야 될 것입니다. 아마 그 환우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예수님께 데려주기를 그들에게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그 환우의 믿음을 보신 것이 아니고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친구의 이 불치병(不治病)을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께 대한 믿음은 그에게 소원하는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들은 용기 있게 행동했고 수고하며 협력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중풍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이셨습니다. 중풍병과 죄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러나 성경은 죄와 병이 관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스런 일들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왔습니다. 각종 병도 그 근원은 죄입니다. 신명기 28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 폐병, 열병, 상한, 학질, 종기, 붓는 병, 괴혈병, 옴, 미침, 눈멂, 경심증 등을 열거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병이 우리의 어떤 특정한 죄의 결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많은 병들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죄가 많은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에는 병도 많고 환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장차 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는 병도 없고 환우도 없을 것입니다. 

21-22절.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시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의논하며 말하기를. “이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감히 죄를 사하겠느냐?” ‘의논한다’는 원어(디아로기제스싸이 διαλογίζεσθαι)는 무엇을 ‘논리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은 사람의 은밀한 생각까지도 아십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마음으로 생각한 것은, 예수님의 말이 신성 모독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 죄를 사할 수 있는 자가 없는데,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그런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23-24절.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인자(人子)는 그가 인성을 가지신 사람으로 오셨음을 증거하는 명칭입니다. 그러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말하는 것은 물론 쉬운 말은 아니지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은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감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덜 어려운 말보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더 어려운 말을 하셨습니다. 

25-26절. 그 사람은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사람은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기적의 증인들이었습니다. 또 ‘곧 일어났다’는 말은 예수님의 치료가 즉각적이며 완전했음을 증거합니다. 이 일은 인성 예수의 일이 아니었고, 신성 예슈아 되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은 단지 병을 고쳐주거나 기적을 행하는 자가 아니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자이십니다. 그분은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사함을 줍니다. 죄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분은 원하시면 죄인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그분을 믿는 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사람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능력의 일들을 확인하고 그분을 믿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눅 1:1-4; 요 20:30-31). 그분의 기적들은 많은 증인들 앞에서 증거된 것입니다(행 2:22).  예수님 믿고 죄사함의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험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성경 읽고 기도하며 그분의 교훈을 순종하면서 주 하나님과 동행합시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만의 특권이며 이러한 삶은 영생과 천국의 길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기쁨과 평강의 길입니다.

4. 죄인을 부르러 오심 Jesus Calls Levi(눅 5:27-32)
(27) 그 후에 예수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29)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30) 바리새인과 그들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31)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27절. 예수님께서는 그 후에 나가셔서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복음 9:9의 증거대로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인 마태입니다. 그가 세관에 앉아 세금을 거두는 관리로서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일에 충실한 사람을 불러 일꾼을 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부근에서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고 있던 모세를 부르셨고(출 3:1-10), 또 들에서 아버지 이새의 양을 치던 다윗을 불러 선지자[대언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하셨습니다(삼상 16:11-13). 

‘나를 따르라’는 말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의 부르심이 아니고 전임사역자로 부르시는 사명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마 4:18-22). 주님께서는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사명자들을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은 그분의 자유로운 행위이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권한에 속한 일입니다. 

28절.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물론 그는 자기가 맡았던 일을 중단함으로 인해 국가나 타인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뒷정리를 신속히 했을 것입니다. 여하튼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것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와 비슷합니다(마 4:20, 22; 눅 5:11).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였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레위는 그의 직업으로 인해 세상적으로 부요한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당시 세리(tax collector)는 로마 정부에서 정한 세금보다 많이 거두어 착복하였기에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Judea) 지방은 시리아 주에 속해 있었고, 시리아 주에 속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벌어들이 소득의 1%를 매년마다 정기적으로 세금으로 내야했습니다. 여기에다가 수입, 수출세가 부과되었고, 농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곡물을 수확한 후 총량의 10%, 포도주나, 과일, 올리브 기름의 경우에는 총 생산량의 20%를 세금으로 더 내야했습니다. 상업에 종하며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도 물건 판매량에 따라 소득세를 달리 냈고,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재산에 내는 재산세를 포함하여 긴급 편성되는 각종 세금들이 허다했습니다. 이것들을 파악하고 거두어 들일 세금의 총액을 계산해 내는 사람이 퍼블리카누스(세리장)입니다. 퍼블리카누스는 세금을 거두어 들이는 권리를 다시 하도급을 주었지요. 아마 레위 마태는 이런 하도급에 속하는 세리로 추정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안정된 직업과 유여한 생활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는 베드로나 야고보보다 아마 더 큰 손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것보다 더 귀한 분이셨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며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지내며 그분을 본받고 그분에게서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분의 인격을 본받으며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배울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명을 이해하여 장차 그분을 계승하며 그 일을 수행할 것입니다. 

29절. 레위는 자기 집에서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그분을 대접하는 기쁨과 사랑의 표시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존경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치를 베풉니다. 레위는 그 잔치에 자신의 동료 세리들과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분이며 죄인의 구세주이심을 깨닫게 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30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제자들을 비난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아마 그 잔치에 초청받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비난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신 것은 성도의 교제로서가 아니고 전도적 관심과 사랑에서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잘 모를 때는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31-32절.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도 우리가 의롭고 선할 때가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고 그분의 계명을 어기고 죄 가운데 있었을 때이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위해서는 누구든지 만나며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어떤 죄악에 빠져 있는 자들과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와 전도적 접촉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과 전도적 접촉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오직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만 참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유주의자들과 가톨릭 지도자들과 큰 전도집회를 여는 어떤 에큐메니칼 방법은 옳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에서 탈선한 자들이며 이런 자들은 전도의 대상이지 동역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 금식에 대하여 A Question About Fasting (눅 5:33-39)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기를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35)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36) 또 비유하여 말씀하시니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33절.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왜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까?”(전통본문)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한 주간에 두 번씩(눅 18:12),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했다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그 선생을 본받아(마 11:18) 또 지금 그들의 선생님이 감옥에 갇혀 있기 때문에(마 4:12; 11:2) 자주 금식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한 의도는 아마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경건을 의심하며 금식을 힘쓰지 않는 그들을 비난하고, 높아지는 그의 명성을 낮추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과 그분의 제자들의 즐거이 먹고 마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34절.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랑에 비유하셨고 제자들을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하십니다. 일찍이 세례[침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에, 자신을 신랑의 친구에 비유한 적이 있습니다(요 3:29). 결혼은 인간의 일들 중에 매우 기쁜 일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랑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한 기쁜 날에 신랑의 친구들이 금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5절. 예수님께서는 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박혀 죽임을 당하시는 날 그리고 그분께서 마침내 하늘로 올리우시는 날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제자들은 금식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 후부터 재림 때까지의 신약교회 시대 성도들의 어떤 생활 원리를 보입니다. 그것은 자기 부정의 삶입니다. 신약 성도는 구원으로 인해 또 천국의 소망 중에 항상 기뻐하며 살며, 또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근신하며 절제하며 자기를 부정하며 자신을 쳐 복종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그분은 단지 금식할 때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교훈하십니다(마 6:16-17). 또 그분은 우리가 극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금식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함도 가르치셨습니다. 마태복음 17:21에 개역이나 현대역에는 “없음”이라고 되어 있는데, 개혁자들의 성경(전통사본, 안디옥사본)에는 “그러나 이런 유의 것[마귀로 인한 간질병]은 기도와 금식으로가 아니고서는 나가지 아니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할 때나 교회 장로들을 세울 때 금식했습니다(행 13:2-3; 14:23). 교회 직분이 고난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며 더 많은 봉사와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직분자들을 세울 때 축하 잔치를 하기보다 오히려 성경의 예대로 금식 기도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입니다. 

36-38절. 예수님께서는 또 비유하여 말씀하시기를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넣어야 하며 그래야 둘 다 보존되리라](전통본문).” 새 옷조각과 새 포도주는 자기 자신에, 낡은 옷과 낡은 가죽부대는 금식의 행위에 비유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는 전통적 금식의 관습이 적절치 않고 새 생활 방식이 필요함을 암시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비유는 구약과 신약의 차이를 보입니다. 구약의 은혜는 율법적 형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은혜는 복음의 형식으로 표현됩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씻음을 받기 위해 양이나 소를 제물로 드렸지만, 신약시대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또 시시때때로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신약 교회에서는 예배 의식이나 예배당 치장보다 신자 개개인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39절. 예수님께서는 또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즉시]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더] 좋다 함이니라.” 옛날의 전통에 익숙한 자들은 즉시 새 것에 적응하기 어렵습니다. 율법적 전통과 관습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즉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역사상 그러하였듯이(행 21:21-26)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간에는 과도기가 어느 정도 필요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주님의 말씀대로 은혜의 깊은 바다로 가서 믿음의 그물을 내려 차고 넘치는 하늘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병들, 허약한 것들, 부정한 것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합토되어 회복되며 정결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고난주간을 잘 지내며 다음 주일 승리의 부활주일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호산나 찬송부르며 주님을 내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이 자리에 임하시며 로이 교회에 입성하시며 저희 가정에 오시옵소서. 베드로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게 하옵소서. 주님께 죄인됨을 고백하며 주님의 사명을 듣고 주님만 따르는 이번 고난 주간이 되게 하옵소서. 다시 부활하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베드로의 배를 빌리신 목적은? (3절)
2. 말씀을 마치신 후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과 베드로의 행동은? (6절)
3. 깊은 곳에 가서 잡은 많은 물고기를 실고 온 배는 누구의 소유이냐? (10절)
4. 나병 환자를 어떻게 치유하셨는가? (13절)
5. 중풍 병자의 죄를 용서하신 후 치유받는 환자가 한 행동은?(25절) 
6. 세리 레위가 예수님을 따른 행동은? (28절)
7.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이유는? (32절) 고난주간을 어떻게 지낼까?

[고난 주간에 묵상할 성경구절]
주일(오늘) 4월 2일 호산나 예루살렘 입성(마 21:1-11, 막 11:1-11, 눅 19:28-38, 요 12:12-19)
월 마리아가 옥합을 예수님에게 붓다(막 14:3-9, 마 26:6-13, 요 12:1-8)
화 종말교훈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전하심(마 24-25장)
수 침묵의 날(기도하신 날) (유다의 배신, 마 26:14-16, 막 14:10-11)
목 최후의 만찬, 세족식, 철야기도(막 14:12-42, 마 26:17-25, 눅 22:7-14)
금 성금요일(Good Friday), 십자가 처형(막 14;43-15:41)
토 성토요일(Holy Saturday), 무덤에서 안식(막 15:42-47, 마 27:57-61, 
   눅 23:50-56, 요 19: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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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겸손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고난 주간 동안 주님의 겸손과 온유, 순종을 배우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4월 3일 월 찬 143장(통 132장) 막 14:1-9, 요 12:1-8, 옥합을 붓다
    4일 화 찬 144장(통 144장) 마 24:1-51 종말 교훈
    5일 수 찬 145장(통 145장) 마 25:1-46 종말 교훈
    6일 목 찬 146장(통 146장) 마 26:36-56 성찬식, 세족식, 겟세마네
    7일 금 찬 147장(통 136장) 마 27:1-56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
    8일 토 찬 149장(통 147장) 마 27:57-66, 막 15:42-47, 눅 23: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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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6시부터) (Zoom으로 동시 중계)
us06web.zoom.us/j/7049077483?pwd=UzNvdldBM04xMFlWQSswVWxDT3YvQT09,  회의 ID: 704 907 7483 / 암호: 1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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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신학교

◉2023년도 봄학기 개강(2023년 2월 27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종강 2023년 5월 22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2023년 4월3일 고난주간. 봄학기 MT (10:00-17:00, 장소: 충주호)
◉장소: 수원 향기나는나무 교회(이태환 목사 시무), 본당과 디모데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네이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연락처: 010-3288-2878, 010-9367-7605, 010-9722-4548
◉로이교회 후원계좌: 농협 302 0280 1002 11 YunSam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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