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예수님 당하신 멸시와 고통, 우리 때문
[나관호목사 칼럼] 예수님 당하신 멸시와 고통, 우리 때문
  • 나관호 목사
  • 승인 2023.01.28 0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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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 목사의 행복발전소 200]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으셨다/
예수님 당하신 찔림, 우리의 허물 때문/
예수님 당하신 상함, 우리의 죄악 때문/

【뉴스제이】 미국에서 카톡에 가입됐다며, 얼굴도 신분도 알리지 않는 사람이 내 칼럼을 보고 테클을 걸어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난과 멸시를 받고 힘들 사셨고, 사람들에게 ‘싫어버리 바’ 될 정도로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셨고, 미남도 아니셨으며,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셨을 것이라는 거룩한 상상(?)을 글로 표현했더니 그런 말이 성경에 어디 있느냐고 근거가 없는 말을 쓰지 말라며 물고 늘어지듯 문자를 계속 보내왔습니다. 

순간 나는 이민교회(?)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일부 성도들에게 복음이 변질된 것은 아닌가’, ‘복음과 십자가가 화려함으로 감싸졌나’, ‘십자가의 고통 그분의 멸시와 천대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가 왜곡되었나’, ‘이민가서 어렵게 살다가 잘살게 되니 고난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성도들이 생기나’ 등등.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에서 

그래서 처음에는 복음을 깊이 모르는 여성도인 줄 알고 주님의 고통과 멸시, 일그러진 얼굴과 피 흘리리심은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이니, 어떤 면에서는 주님의 그런 멸시와 천대, 일그러진 얼굴 속에서 은혜를 발견해야 된다고 이사야 53장을 근거로 말해주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기초이니까요. 

아마도 이 성도는 예수님이 얼굴이 미남도 아니고, 남들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상한 얼굴로 사셨다는 말이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백인 얼굴을 하고 있는 성화 속 주님처럼 미남에다가 당당하고 멋진 할리우드 배우처럼 잘 생기셨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야 지금 자신이 믿는 예수님으로서의 자신의 위상이 높아질 것으로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후의 모습은 달라지셨습니다. 같이 길을 가던 제자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셨으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는 예수님이 당하실 멸시와 천대, 고통과 일그러진 얼굴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2-3)

구약의 복음서 이사야 53장이 말하는 예수님은 연한 순처럼 여리셨고, 바른 땅에서 나온 뿌리처럼 메말라 야휜 모습으로 보이셨고, 풍채도 없이 좀 작으신 모습으로 덩치 큰 운동 선수 같지 않으셔서 육체적인 모습은 사람들이 흠모할 정도가 아니셨습니다. 거기에다가 손짓하며 ‘에이! 에이!’ 할 정도로 멸시와 무시를 받으셨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즉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싫어 버린바’되는 사람들은 마치 한센병 환자 같은 부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당하신 멸시와 천대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신 이유는 이사야 53장 2-3절의 바로 아래에 있는 이사야 53장 4-5절ml 이유 때문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이사야 53:4-5)

그것은 우리 모두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고 구원시키기 위함이셨습니다. 예수님의 멸시와 천대, 고통과 버림바 됨은 일그러진 얼굴 모습으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은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대신 받으셔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을 대신 맞아주셔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아하 난 하나님의 아들이니 고통을 못느껴 하하” 이렇개 말하며 사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신성을 가지셨지만 우리와 같이 철저히 고통을 느끼며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우리, 우리, 우리 때문에 그분은 가난하고 멸시받으며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며 싫어 버림을 받으셨고 끝내 십자가에서 처절히 고통당하시며 죽으셨던 것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늘 같이 다니는 동지입니다. 

예수님의 상하심, 멸시와 천대, 버림 바 됨, 십자가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나관호 교수목사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치매가족 멘토 / 말씀치유회복사역원(LHRM) 원장/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제자선교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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