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예수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겠다”
[나관호목사 칼럼] “예수님 이름으로 너를 용서하겠다”
  • 나관호
  • 승인 2020.07.02 19: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관호목사의 행복발전소 114]
영화 《7번방의 선물》 속 아빠사랑/
하나님 사랑, 예수님 십자가 죽음 예표/
믿음과 기도로 승리할 것 믿어/
하나님 성품 믿으며. 오늘도 인내/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시편 56:5)

【뉴스제이】 2013년 개봉된 천만관객 영화 《7번방의 선물》(Miracle in Cell No.7). 지적장애 아버지를 통해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딸을 사랑한 아빠의 마음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마음과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헌신이 투영됩니다. 이환경 감독은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터기와 인도네시아아에서 리메이크 작품으로 만들어져, 《7번방의 기적》이라는 원제목으로 전세계로 개봉되었습니다.

영화는 변호사가 된 딸 예승이가 사법연수원 모의재판에서 억울하게 사형수가 되어 죽은 아빠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변론으로 시작됩니다. 딸 ‘예승’이의 이름 발음이, ‘예수’로 들리는 것처럼 꾸며진 영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제작자의 숨겨진 신앙 에피소드입니다.

지적장애가 있는 아버지 이용구는 딸 예승이가 원하는 세일러문 캐릭터 가방을 사주고 싶어, 매일 딸과 함께 가방 가게 앞에 전시된 가방을 바라보며 행복해합니다. 그런데 남아있던 가방을 경찰청장의 딸이 사가게 되고, 며칠 후, 엄마와 함께 온 마트 주차장에서 만난 경찰청장의 딸이 용구에게 세일러문 가방을 파는 다른 곳이 있다며 길 안내를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청장의 딸이 얼음판에 넘어지면서 떨어진 벽돌에 머리를 맞아 죽게 됩니다

용구는 아이가 기절한 줄로 알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합니다. 용구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심폐소생술’에 대해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인공호흡과 흉부 압박을 하는 모습을 지나던 아주머니가 보고 놀라, 마치 어린아이를 성추행하는 것으로 오인해 신고를 하게 됩니다.

아이가 유괴 납치된 상태에서 성추행당한 후 죽은 것으로 오인한 경찰청장은 딸의 억울함과 자신과 가족의 울분을 폭발시키며, 강도 높은 수사를 요구합니다. 결국 용구는 사형수가 됩니다.

교도소에 들어온 용구. 수용자들은 선한마음을 가진 용구가 살인자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날, 용구가 조폭 보스가 시해를 몸으로 막아 대신 다칩니다. 보스는 용구의 소원, “딸 예승이가 보고 싶다”는 말을 현실로 만듭니다. 종교행사를 이용, 예승이를 성가대원으로 만든 뒤 교도소에 들어오게 하고, 빵 박스에 숨겨 ‘7번방’으로 데려옵니다. 예승이는 ‘7번방의 선물’이 된 것입니다.

예승이는 교도소에서 아빠 용구와 수용자 나쁜 삼촌(?)들과 함께 생활하게 됩니다. 그러나 교도소장에게 발각되고 용구는 징벌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교도소에 화재가 나고, 대치하고 있던 교도소장이 화염에 쌓여 죽음의 위기를 맞지만, 용구가 살려냅니다.

은혜 입은 교도소장도 선한마음을 가진 용구가 범인이 아닐 것이라는 정황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래서 경찰청장을 찾아가 “용구는 분명 범인이 아니다”라며 재수사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단칼에 거절당합니다. 교도소 수용자와 교도관 그리고 교도소장의 긍휼과 사랑을 받게 된  용구는 교도소 안에서 만큼은 사형수가 아니라 무죄자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예승이가 ‘교도소 7번방’으로 들어와 아빠와 생활하게 됩니다 ‘7번방의 선물’이 ‘7번방의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청장이 자백을 하지 않으면 예승이를 자신의 딸과 똑같은 모습을 만들겠다는 협박을 받습니다. 예승이를 어떻게 든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재판관 앞에서 “내가 그랬어요”라며 아빠의 사랑의 담아 거짓 자백을 하고 ‘누명 쓴 사형수’가 되어, 딸 대신(?) 죽음을 길을 선택합니다. 형 집행일 12월 23일. 그날은 예승이의 생일날입니다. 이유를 모르는 예승이는 “아빠 잘 다녀와”를 말합니다.

영화의 처음 모의재판으로 돌아가, 교도소장의 양딸이 되어 살면서 변호사가 된 예승이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죽음의 길을 선택한 아빠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재판관은 용구의 무죄를 선고합니다. 그때 예승이는 세일러문 명대사를 인용한 마지막 변론을 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아빠를 용서하겠습니다”

영화가 끝이 날 무렵, 제자 목사에게서 진중한 전화가 왔습니다. 내가 쓴 <포스트 코로나, 한국교회 신앙구호,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칼럼과 <포스트 코로나 언택트 시대, 영성신앙만들기>라는 칼럼을 보고 제자 목사가 질문을 해왔습니다.

“교수님! 평안하시지요?”
“임마누엘! 평안하지. 자네는 어떤가?”
“코로나 때문에 뭐, 그렇지요. 지금 권사님들하고 전도 나왔어요.”
“잘했네. 잘했어. 무슨 일로 전화했는가?”

“교수님! 요즘 목사님 글 속에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말씀을 많이 사용하시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으세요? 마침 권사님들과 대화하다 ‘하나님은 다 아세요’라고 하시기에 교수님 생각나서 전화드렸어요?” 

“어! 이유는 있지? 나도 신중하고 부담 가지고 말해. ‘하나님은 다 아시니까.’ 코로나 종식도 아시고, 백신 만들어 낼 비밀도 아실 거고. 허허허”

“그러게요. 그 말씀을 읽고 마음이 찔리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러내요. 옛날에는 쉽게 쓰던 고백인데, 교수목사님 칼럼 읽고, 마음 되짚어 봅니다.”

“그래요. 목사들부터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지. 사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고백신앙이 무너지면, 끝 아닌가.”

전화를 끊고 생각해보니, 요즘 내 삶에서 가장 강조해서 말하는 것이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였습니다. 칼럼에서 대화 나눔에서, 카톡과 문자, 전화통화 중에 등등.

우리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고백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했다고 할 때’ /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데, 했다고 할 때’ / ‘거기에 간 적이 없는데, 갔다고 할 때’ 등등 답답하고 이해는 시켜야 하는데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거나, “나는 결백하고 확실하다”는 의지를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억울할 때는 더더욱 사용합니다. 사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고백은 ‘두렵고 떨리는 행복한 고백’과 ‘억울·답답함을 대변하는 고백’ 두 얼굴로 사용됩니다. 얼마나 가슴 찢어지게 답답하면 그런 말을 쓰겠습니까? 여러분도 나도 그런 두 가지 면을 다 가지고 고백합니다. 

작년 이른가을, 20여년도 넘은 일을 거론하며 아무개가 양심고백을 해주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한 일은 아니지만, 나와 어느 목사 사이를 이간질한 사람을 알고 있는데, 내가 크게 피해 받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고백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대충 누구인지 짐작은 했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 말을 들으니, 여러 가지 내가 당했던(?) 지난 사건들이 오버랩 됐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데 이간질이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죽어야 끝이 날지도 모릅니다. 비밀로 말하는 것 같지만, 다 들려옵니다. 그럴 때면 “하나님은 아시지요?”라고 고백할 뿐입니다. 이 시점에 여러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내가 도움을 준 사람들인데.... 특히, 내가 좋아하고, 나를 신경 써 주는 사람들과의 사이를 ‘어떻게 하면 벌려 놓을까’를 궁리(?)하고, 나를 깎아 내리려고도 합니다. 나의 관계도를 아는 사람이기에 자신은 숨고 누군가를 속임으로 앞세워 이용해 ‘거짓말 선동’으로 관계를 흔들어 놓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나도 영화 속 예승이처럼 세일러문 명대사를 이용해 이간질 하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름으로 너희를 용서하겠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그들이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나를 치는 그들의 모든 생각은 사악이라. 그들이 내 생명을 엿보았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발자취를 지켜보나이다” (시편 56:4-6)

나도 공격형 대형을 만들어 때론 반격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싶지만, 기도하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떳떳할 것 같아 참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지혜인지, 미련한 것인지 판단해야할 것 같습니다. 매번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서.... 그렇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라는 고백이 있기에 참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분별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다 아시니 그분의 성품을 믿습니다. 오늘도 인내하며, 믿음과 기도로 승리할 것을 믿으며,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심을 믿습니다. 여호와 닛시! 주여! 주여! 주여!”

 

나관호 목사 ( 뉴스제이 발행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119긴급기도운동본부 대표 / 조지뮬러영성연구소 소장 / 대중문화 및 교회사 강의교수 / 치매가족 멘토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