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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설교
【뉴스제이】 다음 설교문은 2023년 10월 29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스무두번째 주일, 개혁주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로이교회(인천 송도) 주일예배용입니다. 기도로 주님께 열납되는 주일예배를 준비합시다. 10월은 '개혁의 달'로 지키며, 다음 예배 자료를 나눕니다. 샬롬샬롬!!! (로이교회 / 합동). [참조 :로이교회는 합정동교회(담임 김효성 목사)와 말씀사역을 협력하는 교회로 한국교회를 위해 자료를 함께 기꺼이 공유합니다]
[읽는 예배] “대속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막10장) 
2023. 10. 28 by 윤사무엘 목사

여호와는 나의 목자(43) “대속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막10장) 
             “Jesus who came as the serving ransom.” (Mark10)

본문: 마가복음 10:1-52 
요절: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
주제: 섬김과 비움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처럼 끝까지 봉사하는 믿음 가지자
교독문: 104번(교회개혁주일), 예배의 부름: 히 9:8-10
찬송: 550장(통 248장), 380장(424장), 491장(543장)

일자: 2023년 10월 29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스무두번째 주일, 개혁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로이교회, Loi Presbyterian Church)
  [예배시간: 새벽기도(월-금) 오전6시, 주일예배 오전 11시, 오후 12시 반]
  [교회주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323 (송도동 송도센트로드 B동) 33층 7호, 우편번호: 22007 / 지하철 인천1호 국제업무지구역 2번 출구, 오른쪽에 있는 연수세무서 빌딩 다음 건물(Office B)]

윤사무엘 목사
윤사무엘 목사

오늘은 전세계 교회가 지키는 “개혁주일 Reformation Lord’s Day”입니다. 성경에서 개혁(改革)이란 단어는 히 9:10 “이런 것(율법의 의식)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imposed on them until the time of reformation”에 한번 나옵니다. 여기에 개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디오르쏘시스(διόρθωσις, διορθώσεως)의 뜻은 물건을 올바른 상태로 두는 것을 말합니다. 히 9:11이하에 보면 이 개혁의 주체가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개혁의 구호는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분께서 그것을 그에게 의로 여기시고 And he believed in the Lord, and he counted it to him for righteousness.”(창 15:6)과 하박국 대언자가에게 주신 하나님의 대답인 “오직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 but the just shall live by his faith”(합 2:4)라 복음신학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 Sola Fide”에서 이신칭의(以信稱議, justification by faith) 믿음을 말합니다.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는 독일어로 der Rechtfertigung durch den Glauben이라 표현하며 구원이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Sola Fide)”를 통해서 오는 것이지 사제에 의한 사죄나 고해성사를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자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과 각을 세웠습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95개조)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Sola Scriptura) 성경에 어긋나는 교리와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리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황에게 파문을 당했습니다. 또한 루터는 용서를 받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에 의한 것이지 사제나 교황의 권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바른 믿음이 칭의에 이르게 한다는 가르침은 개혁주의 고백문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벨기에 신앙고백성 제22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61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제2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답, 대요리문답 제70문답에서 “오직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까? 
: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only by true faith 됩니다.(롬 3:21-26, 5:1-2; 갈 2:16; 엡 2:8-9;  빌 3:9). 비록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롬 3:9-12, 약 2:10-11) 여전히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다고(롬 7:23) 나의 양심conscience이 고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sheer 은혜로(신 9:6, 겔 36:22, 롬 3:24, 엡 2:8, 딛 3:5)  그리스도의 온전히 만족케 하심satsfaction과 의로움righteousness과 거룩함holiness을 선물로 주십니다.(롬 4:24-25; 고후 5:21; 요일 2:1-2).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obedient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롬 4:4-8; 고후 5:19) 오직 믿는 마음a believing heart으로만 나는 이 선물을 받습니다accept.(요 3:18; 롬 3:22)   

61문: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by faith alone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고전 1:30; 2:2).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righteousness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롬 10:10; 요일 5:10).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어떻게 믿음을 통해 나의 것이 되나요?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하는 일에 있어서 수단이 됩니다. ‘전가’(轉嫁, imputation)란 옮긴다, 떠넘긴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로움이신데, 그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기 위해서 ‘전가’됩니다. 우리에게 옮겨집니다. 우리의 것으로 돌려집니다. 우리가 의로움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의로움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제 우리의 것이 됩니다.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간주된다(account).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dikaiosyne)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죄인 사이의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이 이루어집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마가복음 10장을 강해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주님의 구속사 계획을 발표하시면서 여러 주제를 놓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의 모든 죄짐을 대신 져 주신 대속물로 오셨음을 분명히 가르치십니다.

1. 이혼에 대하여 가르치시다 Jesus teaches about divorce. (막 10:1-12, 마 19:1-12)
(1) 예수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 더 먼쪽으로 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거늘 주님께서 다시 습관대로 가르치시더니(마19:1, 요10:40) (2) 바리새인들이 주님께 나아와 그분을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마19:8)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마5:32, 마19:9, 눅16:18, 롬7:3)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1절.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떠나 유다 지방쪽으로 더 먼 방향으로 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주변에 모여 들었습니다. 마가복음 1-9장까지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하신 내용이고 10-15장까지는 유대 땅에서 하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두 사역 사이에 누가복음 9장-18장 사이에 많은 사건들을 담고 있습니다(70문도 파송, 잃은 양 비유, 잃어버린 동전 비유, 잃은 아들 비유). 마태는 누가복음보다는 적지만 마가보다는 더 많은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갈릴리는 유대주의 반항 운동의 심장부였습니다. 이것은 그 주위의 반 유대주의 백성들로 둘러 싸였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3:1에 보면 명절날에 갈릴리인들이 대소동을 일으켜 빌라도가 보복을 한 장면이 있습니다. 또한 A.D. 70년에 일어난 반 로마운동에서도 로마인들이 갈릴리인들을 쳐부수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라고 요세프스가 말했습니다.

2절.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시험할 목적으로 이혼에 대해 물었습니다. 질문의 의도 자체가 실제 무엇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논쟁을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까지 한 행동으로 보아서(안식일도 쉽게 범하고(막2:23), 그리고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한 일들(요8:1-11)을 연상하면서 이혼에 대한 문제도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들은 고소할 제목을 또 하나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답변에는 제자들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마19:10).

3-5절. 예수님께서는 먼저 이들에게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들은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고의적으로 허락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신 24:1-4). 모세는 사람이 이혼증서를 써주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을 고의적으로 허용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성경) 속에 명령된 것이 아니고 다른 책에 내려오는 임의의 입장"이라고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악하여 음행하고 연약한 아내를 학대하고 울리고 가슴에 큰 상처를 주고 그를 버리기까지 합니다. 결혼생활 중 구타당하고 마음과 육체의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왜 이혼에 대한 그런 입장을 취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원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명령이 아니요, 율법시대에 공개적인 간음과 결혼관계를 무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쉽게 이혼이 가능하도록 양보한 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면 된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9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고 하십니다.

6-9절. 그러나 이혼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것이 결혼제도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의 뜻에 반대된다고 하십니다. “창조시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주님께서는 이혼이 합당하지 않음을 가르치시면서 그 근거로 최초의 결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결혼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버리든지, 아내가 남편을 버리든지, 버리는 행위는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혼에 대해서 논쟁하시는 것보다 결혼에 대한 원론적인 말씀을 강조하십니다. 

10-12절. 저녁에 유하시는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간음’은 결혼한 사람이 부부가 아닌 상대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본처에게’라고 번역한 말은 원문에 ‘그에게’라는 말인데, 그것은 본처보다 재혼한 상대를 가리킬 것입니다. 잘못된 이혼에 근거한 재혼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입니다. 음행과 간음이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2.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다 Let the Children Come to Me.(막 10:13-16, 마 19:13-15; 눅 18:15-17)
(13) 그들이 어린 아이들을 그분께 데리고 와서 앉아 주시고 쓰다듬어 주시기를 원하니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지 아니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3-14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자, 제자들이 그 데려온 자들을 꾸짖었습니다. 부모들은 예수님께서 자기 자녀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라며 데려왔고 제자들은 그것을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광경을 보시고 언짢게 여기시며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임이니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기쁘게 영접하십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의 비교적 순진함과 양순함을 장점으로 말씀하신 것일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대체로 순진하여 무엇을 의심할 줄 모릅니다. 그는 배운 대로 믿고 행합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 바른 교육이 매우 중요하고 또 효과적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대로 어린아이들을 귀하게 여기며 사랑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15-16절. 예수님께서는 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영접하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후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들같이 천국을 영접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어른은 성경말씀을 복잡하게 생각하여 의심하지만, 어린아이는 비교적 솔직하고 단순하고 양순하게,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릅니다. 그래서 어린이는 어른의 선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영화 장면
예수님 영화 장면

3. 재물이 많은 사람 The Rich Young Man(막 10:17-31, 마 19:16-30; 눅 18:18-30)
(17) 그분께서 길로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그분께 대답하기를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21) 이에 예수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24) 제자들이 그분의 말씀에 깜짝 놀라는지라. 예수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마19:24) (26) 그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27)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그분께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저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나이다” (29) 예수님께서 응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아내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대하25:9, 시19:11)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17절. ”길에 나가실쌔“는 10:10의 집에서 나갔을 때(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고)를 말합니다. ”꿇어앉아“는 예수님께 겸손을 보이는 태도입니다. 마태는 청년(마19:20, 22), 누가는 관원(눅18:18)이라고 적었고 세 복음서 모두 부자라고 말합니다. 종합해 볼 때 "부자 청년 관원"입니다. 시세말로 돈이 많고, 직장이 분명한, 잘 나가는 청년입니다. 이 청년은 여기에 도덕적으로 흠 잡을 데 없는 모양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수께 무릎을 꿇고 겸손한 태도로 묻고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트집을 잡으려고 묻는 것하고는 분명히 다른 모습입니다. “선한 선생님” 이란 칭호는 랍비보다 더 보편적인 선생으로 존경하는 표현입니다. 

18절.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이 말은 예수님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역의 문맥상 모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싶게 번역한다면 “너는 지금 경솔한 태도로 나를 선하다고 부르고 있지만, 너는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지 못하다. 네가 선하다는 것에 깊이 생각하고 싶다면, 홀로 선하신 하나님과 또한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생각하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20절. 예수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영생하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이 청년은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주석하기를 그는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자기 의무를 어려서부터 잘 지켰다고 하는 거짓된 확신을 자랑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 

21-22절. 예수님께서는 이 철없는 청년을 보면서 그를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라고 말씀하심으로 이 청년의 단순하면서도 순진한 생각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결정적으로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함으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 청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사태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슬퍼하며 떠나간 이 청년에게 약간의 동정이 갈지 모르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23-26절. 부자 청년의 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설명하십니다. 이에 대한 비유로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십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예루살렘 약대가 짐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으로 또는 예루살렘의 성문이 저녁이 되면 닫히는데 뒤의 쪽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쪽문에 약대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짐을 내려 놓고 이리저리 비틀며 겨우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고 합니다.  

26-27절. 제자들은 놀랐고 “그러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를 주님께 물으니 “사람으로는 불가능하며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하심으로 구원의 문제가 사람의 노력이나 행동으로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긴박한 대화는 계속되는데 베드로가 이번에도 또 나섭니다. 

28절. “보소서 우리가”는 돌아가 버린 부자 청년과 대조되는 말로 자신들을 과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이 부분은 단순한 강조 이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막8:12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진실로는 Amen(ἀμὴν 아멘)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장을 찍는 것과 같은 예수님 특유의 방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인 것입니다. 

29-31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어부였던 자들은 예수께서 부르실 때 배와 그물과 부친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마 4:20, 22).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주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해 가족이나 재산을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헌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족과 재산을 백배나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인 신약교회를 가리킬 것입니다.

또 “그러나 먼저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된 자’는 유대인 성도를, ‘나중된 자’는 이방인 성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또 신약교회 안에서도 믿은 지 오래되었다고 신앙이 앞선 것은 아닐 것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에 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릅시다. 우리는 이 세상 대신 천국과 영생을, 돈 대신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택합시다. 예수님께서는 네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교훈하십니다(마 6:19-20).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 여겼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빌 3:7-8).

4. 죽음과 부활을 세 번째로 이르시다 Jesus Foretells His Death a Third Time(막 8:32-34, 마 20:17-19; 눅 18:31-34) 
(32)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마20:17, 눅18:31) (34)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2-34절.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러, 고난의 현장에 가는 길인데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실만큼 걸음이 빠르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죽임을 당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정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주 부르십니다. 이것은 그분의 인성(人性) 즉 그가 사람이심을 증거합니다.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는 인자 곧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고 고난을 받으셨습니다(vere Deus).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의 아들로 오신 것 자체가 말할 수 없는 자기 비하(自己卑下)[자신을 낮추심]이었습니다(vere Homo). ‘능욕하다’는 말은 ‘조롱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 뱉고 채찍질하였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3일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일은 사복음서들에 증거된 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되어질 일을 정확히 예언하셨고 그 예언대로 그 일이 정확히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그분의 신성(神性)의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5. 야고보와 요한이 구하는 것 The Request of James and John(막 10:35-45, 마 20:20-28, 눅18:31-34)
(35)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저희들이 구하는 것을 저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37) 여짜오되 “주님의 영광중에서 저희들을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39)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내가 받는 침례로 침례를 받으려니와 (40)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42) 예수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눅22:25)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마20:26, 눅9:48)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35-37절. 열두 제자들 중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저희들의 구하는 바를 저희들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말하기를 “주님의 영광 중에서 저희들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조금 전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영광의 보좌의 좌우에 앉기를 탐내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인간적이며 세상적 욕심이었습니다. 

38-41절. ‘나의 마시는 잔,’ ‘나의 받는 세례[침례]’는 십자가의 고난을 가리킵니다. 그런 고난을 그들이 과연 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침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예비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니라.” 주님은 야고보와 요한이 그분의 고난에 참여케 될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목베임을 당하였습니다(행 8:1). 터툴리안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로마에서 끓는 가마솥에 던지웠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그는 그 후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던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후에 에베소로 돌아와 늙도록 생존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성도가 소원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준비된 자들 즉 예정된 자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말씀 나눔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화를 냅니다. 그들이 분히 여겼다는 것은 그들 속에도 같은 욕심이 있었음을 보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오늘 우리 속에도 비슷한 인간적이고 세속적 욕심이 있을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고 다 버려야 합니다. 

42-44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은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은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아노라.” 이것이 세상 나라의 모습입니다. 세상에서는 큰 자가 작은 자를,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립니다. 거기에는 섬김의 정신이, 이론적으로는 있을지 모르나, 실제로는 없습니다. 세상은 힘과 권세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성의 한 면모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십니다. 섬김의 지도력(servant leadership)이 주님의 정신이며 교훈입니다.

45절. “인자(人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오늘의 요절입니다. 우리가 서로 섬기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 까닭은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몇 가지 진리를 담고 있는데, 첫째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요한복음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둘째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代贖物)로 주신 것입니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셋째로,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셔야 할 주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고난의 종이 되셨습니다. 여기에 섬김의 모범이 있고 교훈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계급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직분은 계급이 아니고 오직 봉사의 직무와 책임일 뿐입니다. 직분에 명예가 따른다면, 그것은 단지 그 직분자의 그 직분에 대한 충성과 열매에 달렸을 것입니다. 오늘 개혁주일을 맞이하여 교회가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죄의 값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길은 구주 예수를 믿는 것뿐입니다(요 3:36). 

6. 맹인 바디매오가 고침을 받다 Jesus Heals Blind Bartimaeus.(막 10:46-52, 마 20:29-34; 눅 18:35-43)
(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사람들과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47) 나사렛 예수님이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분께서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아오거늘 (51)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10:36)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님을 길에서 따르니라.

46-52절. 여리고에서 만난 한 맹인(거지 바디매오)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고 소리지르기를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마1:24)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곳에서 사신 연고로 육체적으로만 예수님을 이해하여 부른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메시야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시17:21).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무엇을 요구할지를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확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도 구체적인 기도제목을 주님께 올려드립시다.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고 고백하니 예수님께서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으로 개혁합시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시다.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처럼 섬기는 종의 리더쉽을 발휘합시다. 주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참된 교회, 바른 신앙,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오늘 말씀대로 주님의 고난의 쓴잔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대속물로 주려 오신 섬김의 정신으로 개혁되기를 원합니다. 물질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개혁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결혼과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을 나누자(1-12절)
2.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은?(15절)
3. 부자 청년이 예수님의 말씀에 영생을 포기한 이유는?(21-22절)
4. 구원에 대한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27절)
5. 세 번째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것을 묵상하자(33-34절)
6. 예수님의 마시는 고난의 쓴잔을 우리도 마실 수 있나? (38절)
7. 바디매오가 시력이 회복된 과정을 설명해 보자(46-5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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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성숙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매일 주님의 겸손과 온유, 순종을 배우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10월30일(월) 찬 585장(통 384장) 레 21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
      31일(화) 찬 585장(통 384장) 레 22 성물을 먹는 규례
11월 1일(수) 찬 580장(통 371장) 레 23 여호와의 절기
       2일(목) 찬 586장(통 521장) 레 24 항상 성소의 등불을 켜는 규례
       3일(금) 찬 569장(통 442장) 레 25 안식년 규례
       4일(토) 찬 570장(통 452장) 레 26 상과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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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6시부터) (Zoom으로 동시 중계)
< 겟세마네TV & 로이교회의 예약된 Zoom 회의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https://us06web.zoom.us/j/9991131127?pwd=YVFycnhvOEhNSmpiWFZJUTA0N0Rhdz09
회의 ID: 99 9113 1127
암호: 1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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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신학교 Gethsemane Mission Seminary

◉ 2023년도 가을학기 개강(2023년 8월 28일 월)
   종강(2023년 11월 27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30분)
   개교 35주년 학술대회 (2023년 11월 29일 수 오전 10시 ~ 오후 3시) 
    여전도회관(종로5가) 2층 [강사: 윤사무엘, 류재이, 박호용, 박신배]
◉ 2023년 10월 30일 월 수업(가을학기 8주차)
   1교시(세계교회사), 원우회의, 점심 및 친교, 2교시(소선지서/한국신학), 
   3교시(테루마/여호와의 절기), 4교시(성경변증, 원어성경강독)
◉장소: 본교 채플실, 네이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연락처: 032-832-0691, 010-9113-1127
[본 신학교의 신앙노선은 성경이며, 청교도의 신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바탕을 두며, 세계 선교를 힘쓰며, 재림하실 예수님을 준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진리, 생명임을 믿고, 말씀과 기도로 성화생활하며 구원의 서정을 이루는데 힘쓴다]
◉등록금납부 은행구좌번호: 농협 3019113112731 겟세마네신학교 한국캠퍼스
               문의: 032-832-0691, 010-9113-1127           
◉로이교회 후원계좌: 농협 302 0280 1002 11 YunSam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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