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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설교
【뉴스제이】 다음 설교문은 2023년 10월 22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스무한번째 주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로이교회(인천 송도) 주일예배용입니다. 기도로 주님께 열납되는 주일예배를 준비합시다. 10월은 '개혁의 달'로 지키며, 다음 예배 자료를 나눕니다. 샬롬샬롬!!! (로이교회 / 합동). [참조 :로이교회는 합정동교회(담임 김효성 목사)와 말씀사역을 협력하는 교회로 한국교회를 위해 자료를 함께 기꺼이 공유합니다]
[읽는 예배]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 (막9장) 
2023. 10. 21 by 윤사무엘 목사

여호와는 나의 목자(42) “변화산에서 변모하신 예수님” (막9장) 
                       “Jesus who was transfigurated.” (Mark 9)

본문: 마가복음 9:1-50 
요절: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취해 따로 그들을 높은 산으로 이끌고 가사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시매 그분의 옷이 빛나며 땅 위의 어떤 세탁공도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눈처럼 매우 희게 되었더라” (막 9:2-3)
주제: 율법의 시대, 예언의 시대도 지나가고 복음의 시대가 도래 되었다
교독문: 87번(요계21장), 예배의 부름: 엡 3:20-21
찬송: 550장(통 248장), 380장(424장), 491장(543장)

일자: 2023년 10월 22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스무한번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로이교회, Loi Presbyterian Church)
  [예배시간: 새벽기도(월-금) 오전6시, 주일예배 오전 11시, 오후 12시 반]
  [교회주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323 (송도동 송도센트로드 B동) 33층 7호, 우편번호: 22007 / 지하철 인천1호 국제업무지구역 2번 출구, 오른쪽에 있는 연수세무서 빌딩 다음 건물(Office B)]

윤사무엘 목사

다음 주일은 교회개혁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란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기독교는 종교(인간이 만든 제도 religion)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복음이며 계시입니다. 신앙개혁 혹 교회개혁이라고 사용해야 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 가톨릭 신부 및 교수가 95개 항의문을 교황에게 공개적으로 내걸고 교회 개혁을 시작하였습니다. 교황 레오 10세(Leo PP. X, 217대 교황, 재위 1513~1521년)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 판매를 승인하자.

루터는 이에 반박하면서 그가 교수했던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정문에 항의문을 게시한 것입니다. 올해는 루터가 교회개혁을 시작한지 506년 째를 맞이합니다. 지난 500년의 신학은 이신칭의의 바울 신학이 중심이었다면 이 시대는 사랑의 복음을 완성한 요한 신학이 중심입니다(박호용 교수 주장).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교회[신앙]개혁의 신앙고백을 흔히 5대 솔라(Five Solas)라 부릅니다. 곧 오직 성경(Sola Scriptura 딤후 3:16), 오직 은혜(Sola Gratia 엡 2:8), 오직 믿음(Sola Fide 갈 2:16),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행 4:12),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고전 10:31)입니다. 라틴어로 성경(Scriptura). 은혜(Gratia), 믿음(Fide)가 여성형이어서 Sola로 수식하며, 그리스도(Christus)는 남성형이어서 Solus로, 하나님에게로(Deo)는 3격(여격)이어서 Soli로 수식합니다.

오늘날 에큐메니칼 운동에 힘쓰는 WCC, WEA 등 교회연합에서는 “개혁주일”을 가볍게 넘어갑니다. 가톨릭과의 연합을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성경적인 교회는 “교회개혁주일”을 매우 중요하게 지킵니다. 다음 주일 개혁주일로 지키며 이번 주간에 585장(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외우며 부릅시다.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마가복음 9장을 묵상합니다. 신학교 시절 마가복음을 공부할 때 문상희 교수님께서 설명하시기를 마가복음 9장을 기점으로 1-8장은 “저 높은 곳으로 나아갑니다” 주제로 변화산을 향해 가는 도중에 행하신 예수님의 기적들과 선교를 다루며, 10-13장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주제로 십자가를 지시러 저 낮은 곳으로 향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매우 도움이 됩니다.

1. 예수님께서 변모하시다 Jesus was transfigurated. (막 9:1-13, 마 17:1-13, 눅 9:28-36)
(1)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행2:2) (2) 엿새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분의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왕하18:17, 말3:2)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이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님께 아뢰기를 “랍비여, 저희들이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저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분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그들이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과 자기들뿐이었더라(눅9:36)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그분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마17:9) (10)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1)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2)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참으로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마14:3).

1절.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이 예언은 상당히 의견이 분분합니다. 언뜻 보아 주님의 재림을 예언한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 당시의 사도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살아있을 동안에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습니다(참고 요21:23, 벧후3:4). 그리고 현재에도 주님의 재림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주님의 재림으로 생각하기 어렵고 다른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임박한 변화산상의 변형을 의미하거나 둘째,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을 가리키든지(골2:15), 셋째, 성령[성신] 강림을 의미하든지, 넷째, 천국의 축복이 이방인에게까지 미친 것입니다. 이 중에서 제일 유력한 것은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의 부활로 사망의 이기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이 땅에 임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2절. 엿새 후에는 창세기의 "엿새 후"를 연결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것은 무리한 방법이고 여기서는 단순히 한 주간이 지났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들은 7일이 일주일의 개념으로 정착했으나 당시의 유대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팔일쯤 되어"라고 기록합니다. 요즘으로 말한다면 [일주일쯤 되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변화산에 가셨는지에 대해서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편애에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꼭 설명을 해야한다면 주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는 것과 이들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열심과 영적인 반응을 보임으로 선택했을 것입니다(마8:29, 막5:37). 여기서 말하는 “높은 산 an high mountain”은 어느 산인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초대 이후 16세기 경까지는 다볼산(Tabor)으로 이해하였으나[산 위에 변모기념 교회당이 있음] 다볼산은 예수님께서 계신 이곳으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고, 560m 밖에 안되어 높은 산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앙산악지대가 800-1200미터에 위치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많은 학자들은 앞의 장에 나오는 신앙고백 장소인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가깝고 2814m인 헬몬산(Hermon 헤르몬산)으로 보고 있습니다.

4절.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마태와 누가는(마17:3, 눅9:30)는 모세를 먼저 언급한 반면 마가는 엘리야를 먼저 언급했습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순서적으로 당연히 모세를 먼저 언급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인데, 마가의 어떤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도 엘리야가 마치 모세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모세는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구약의 예언자를 대표하며 특히 예수님 전에 나타나는 대언자(말4:5-6)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나타나 ὤφθη(오프데)”는 "보다"라는 동사입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눈으로 엘리야와 모세를 보고 있음을 말합니다.

5절. 베드로는 분명히 그때 그 상황이 순간적으로 황홀해서 산을 내려가지 말고 그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초막(tabernacles) 셋을 지으면 어떻겠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적인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순간적인 흥분에 빠져 나온 말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지금 마가나 혹 다른 제자들에게 산 위에서 있던 사건을 설명할 때 지금까지도 그때 그 사건을 생각하면 흥분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6절. “그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아마도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저자 마가는 그때 그 장소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에 의해서 이 말이 마가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7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구름 속에서 난 소리는 모세나 엘리야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8-10절.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이 금령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의 한시적인 것입니다.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바로 그분께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사역 기간을 단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마음에 두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서로 물었습니다.

11-13절.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말라기 4:5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대로 보냄을 받은 자가 세례[침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1:14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7:13에 보면, 제자들은 성경에 예언된 그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알았습니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무시하였습니다. 

예수님 영화 장면
예수님 영화 장면

2. 마귀 들린 아이를 고치시다 Jesus Heals a Boy with an Unclean Spirit.(마 17:14-20; 눅 9:37-43 상)
(14)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마17:14, 눅9:37) (15) 즉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매우 놀라며 그분께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그분께서 서기관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논쟁하였느냐?” (17) 무리 중에서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마귀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마귀가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제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마17:19, 눅9:40).”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마귀가 예수님을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tare)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그분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마귀가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제가 믿나이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엡2:8). (25)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마귀를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마귀야,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마귀가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막9:20) (27) 예수님께서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그분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저희들은 어찌하여 능히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마17:19) (29) 이르시되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마 17:21).

14절.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높은 산위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니 문제가 생긴 것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서 또 다른 무리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습니다. 

15-17절. 그곳에서는 마귀들려 말 못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18절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헬라어 욱 이스퀴산 οὐκ ἴσχυσαν) 직역하면 “힘이 세지 못하였다”입니다.

20절. 이 마귀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고꾸라져 거품을 흘렸습니다.

23-24절.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전통사본에는 “네가 믿을 수 있다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KJV). 그 아버지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곧 소리를 지르며 말하기를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전통사본에 보면, 그는 울면서 소리질렀고 “주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이란 키리오스 단어는 그 당시 황제에게 사용하는 호칭인데 그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그렇게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기도할 때 믿음으로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25-27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달려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마귀를 꾸짖어 명하시기를 “벙어리 되고 귀먹은 마귀야,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이 명령으로 충분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자연계와 정신계를 주관하는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명령이 선포되자, 그 마귀는 소리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갔습니다. 그 아이는 죽은 것같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했으나 예수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 아이는 일어섰습니다. 멍쩡하게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치료는 즉각적이고 완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28-29절. 예수님께서 저녁에 집에 들어가 키두쉬(Qiddush) 시간(저녁식사 및 질의응답시간)에, 제자들이 그분에게 조용히 묻기를 “저희들은 어찌하여 능히 그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전통사본에는 “기도와 금식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마 17:21, 없음으로 되어 있으나 전통사본에는 있음). 기도와 금식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기도하지만, 믿음이 없으면 기도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약하면 조금 기도하고, 믿음이 강하면 많이 기도할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 (마 6:6), “기도할 때는 ... 믿고 구하라” (마 21:22), “마음을 같이하고 기도하기에 힘썼느니라” (행 1:14), “제자들은 기도와 말씀전하는 것만 행하니라” (행 6:4, 10:31, 롬 12:12, 고전 7:5, 빌 4:5, 골 4:2). 

금식은 생명의 힘을 주는 음식의 공급을 중단하고 포기하는 것이므로 비상한 기도의 방식입니다. 아무런 방법이 없을 때, 성도는 오직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금식 기도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방법에 의지하는 것으로 어려운 문제 해결의 열쇠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기도와 금식으로 이깁시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며, 금식기도는 비상한 때에 올리는 비상한 기도입니다.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이 금식의 정신입니다. 우리도 중대한 문제나 매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금식하며 기도합시다.  

3. 죽음과 부활을 두 번째로 말씀하시다(막 9:30-32, 마 17:22-23; 눅 9:43 하-45)
(30)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그분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 이는 그분께서 자기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0-32절. 예수님과 제자들이 변모산(헤르몬산, 헐몬산)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 와서 갈릴리 호수 지방으로로 지날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인자(人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날 구원의 계획(design)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그 당시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였습니다. 32절의 말씀(흐레마 τὸ ῥῆμα)은 “증언된 말씀, 선포된 말씀, 실천이 수반되는 말씀”이고, 로고스(ὁ Λόγος)는 사상적인 실현으로서의 말씀의 근원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레마입니다. 레마는 신약성경에 68번 나옵니다(마 4:4, 12:36, 18:16, 막 14:72, 눅 1:37, 2:15, 18:34, 요 3:34, 6:68, 행 2:14, 10:22, 롬 10:8, 히 11:3 등)

4. 누가 크냐? Who Is the Greatest? (막 9:33-37, 마 18:1-5; 눅 9:46-48)
(33)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마18:1, 눅22:24) (34)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논쟁하였음이라 (35) 예수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약4:6)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마18:2, 막10:16) (37)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3-34절. 주님의 선교 센터인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길에서 “누가 큰가?” 하고 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나 많은 사람들에게 명예심이나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성의 본질은 교만과 욕심이요 그것은 남에게 높임을 받으려는 명예심과 남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포함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논쟁이 부끄러운 것임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결함을 고쳐주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하고 온전한 인격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35절.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교회 안에서 큰 자는 나이나 학력, 재력이나 사회적 신분, 심지어 신앙 연륜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다 한 요소이긴 하겠지만, 바른 판단 기준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교회에서 큰 자는, 겸손히 다른 교인을 섬기는 자입니다. 겸손히 모든 사람을 섬기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크게 여기시는 덕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고 교훈하십니다(벧전 5:5). 

36-37절. 예수님께서는 또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내 이름으로 in my name’라는 말은 ‘내 이름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즉 그 어린아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름 때문에, 그가 예수님 믿는 가정의 자녀라는 이름 때문에, 또는 그에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려는 이유 때문에, 그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 때문에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그것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전도자로 내보내실 때도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마 10:40).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위해 대속(代贖)의 죽음을 죽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엡 4:2).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 

5. 우리를 위하는 사람 Anyone Not Against Us Is for Us. (막 9:38-50, 마 18:6-9; 눅 9:49-50; 17:1-2)
(38) 요한이 예수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39)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43) 만일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또는 (44)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5) 만일 네 발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또는 실족하게 (46) 지옥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7)  만일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롬8:13)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49)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레2:13).

38절. 사도요한이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어쫓은 그 사람이 진실한 성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시대에 마귀를 내어쫓는 하나님의 은사가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풍성한 은사를 내리시는 시대에 주어진 부스러기와 같은 은혜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내어쫓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습니다.

39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이는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주님꼐서는 그들도 포용하십니다. 그의 이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에 대한 공공연한 비난이 없고 내용적으로 명백한 오류가 없는 한, 그를 허용하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밝히 증거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정통기독교회를 비방하는 자유주의자들이나, 성경적 기독교를 명백히 왜곡시킨 가톨릭이나 각종 이단종파들은 명백히 교제를 끊어야 할 대상들입니다. 

10월 개혁의 달을 맞이하여 비진리와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명백히 비성경적인 교훈을 하거나 성경적 교회를 비방하는 것이 아닌 경우, 우리 파가 아니고 우리 교회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해서 그를 비난하고 정죄하려는 태도는 편협한 당파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가짐과 태도를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40절. “이는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임이니라”(전통본문)고 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을 반대하지 않는 자의 모든 일이 허용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을 행하며 그를 공공연히 반대하지 않는 자는, 비록 다른 점들에 있어서 잘못이 있을 수 있을지라도,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다른 형제들에 대해 이런 정도의 포용심을 가져야 합니다.

41-42절.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우리는 그리스도께 속한 어린아이 하나라도 영접하고 대접해야 하며 그것은 상 받을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아이 하나를 범죄케 하는 행위는 심히 큰 죄가 될 것입니다.

43-50절. 주님께서는 또 본문에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강조해서 지옥의 교리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43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말하는 생명(텐 조엔 τὴν ζωὴν)은 정관사를 동반하기에 “영생”을 뜻합니다. 죄인이지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사의 선물입니다(요 3:16, 요일 1:2, 9).

44, 46, 48절. “지옥에는 그들의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전통사본). 우리말 성경에는 44절, 46절에 “없음”이라고 되어 있으나 전통사본(사도들 전통)에는 48절에 있는 말씀 그대로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옥의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지옥은 천국과 대조되는 세계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세상의 마지막 상태 곧 영원한 상태입니다. 그것은 몸의 죽음 후의 영혼의 상태일 뿐 아니라, 부활 후의 영원한 상태입니다. 천국은 영생의 나라요 영광의 나라이며 영원한 행복과 즐거움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옥은 영원한 형벌의 세계, 영원한 고통과 불행과 치욕이 있는 세계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손과 두 발과 두 눈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에 가는 것보다 한 손과 한 발과 한 눈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지옥은 형벌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부활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요 5:28-29에서 그는,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십니다(요 5:28-29). 사도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을 믿었고(행 24:15), 또 예수 그리스도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라고 말하였습니다(딤후 4:1, 단 12:2).

지옥의 교리는 성경적 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이 본문 외에 다른 여러 곳에서도 지옥에 대해 말씀하십니다(마 5:22, 27-30; 10:28; 23:15, 33; 25:41, 46; 눅 12:5). 주님께서 가르치신 지옥은 악인의 몸과 영혼이 함께 던지우는 형벌의 장소이지만(마 10:28), 누가복음 16:23-28에서 악인이 죽은 후 아직 부활하기 전에도 그 영혼이 지옥에서 고통을 당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자이십니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요(롬 6:23) 그것은 지옥 형벌을 포함합니다. 

49-50절.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레 2:13)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천사도 흠모하는 화해의 직분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를 인식하고 두려워합시다. 사람은 다른 이의 몸을 죽일 수 있지만 영과 혼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함께 지옥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에 던지시는 두려우신 심판자이십니다(마 10:28). 지옥은 하나님의 공의가 어떠함을 잘 증거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공의를 바르게 인식하고 그분을 두려워합시다. 또 우리는 죄의 심각한 문제를 인식합시다. 죄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죄의 보응은 죽음이며 그것은 지옥 형벌을 포함합니다. 아무리 작은 죄라 할지라도 죄는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무서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하고 모든 죄를 다 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손과 우리의 발과 우리의 눈이 우리로 범죄케 하지 못하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합시다. 우리의 의는 예수님의 피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의만 의지합시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게 하시며 우리 마음 속에 변모하셔서 주님의 의로 거듭나게 하옵소서. 율법의 시대가 지나가고 대언의 시대가 지나가고 복음의 시대가 되었음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예수님 믿고 의지하여 우리의 신앙과 교회가 개혁되게 하옵소서. 죄와 욕심으로부터 해방되어 결코 지옥에 들어가지 말고 주님이 거하시는 새하늘 새땅에 입성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란? (1절)
2. 변모산상에서 주님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는가? (3절)
3.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이곳에 거주하자는 건의의 결과는?(7-8절)
4. 다시 온다는 엘리야의 예언(말 4:5)의 성취는? (11-13절)
5. 말 못하게 하는 마귀에 들린 아이는 어떻게 고칠 수 있나? (29절)
6.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인가? (33-37절)
7. 지옥의 교리를 정리해 보자(44-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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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성숙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매일 주님의 겸손과 온유, 순종을 배우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10월22일(월) 찬 260장(통 194장) 레 15 몸의 유출병에 관한 규례
    23일(화) 찬 261장(통 195장) 레 16 대속죄일(욤 키푸르)
    24일(수) 찬 262장(통 196장) 레 17 피의 신성함
    25일(목) 찬 263장(통 197장) 레 18 성적 윤리에 대한 법
    26일(금) 찬 264장(통 198장) 레 19 윤리와 의식에 대한 법
    27일(토) 찬 265장(통 199장) 레 20 불법한 자에 대한 처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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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6시부터) (Zoom으로 동시 중계)
< 겟세마네TV & 로이교회의 예약된 Zoom 회의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https://us06web.zoom.us/j/9991131127?pwd=YVFycnhvOEhNSmpiWFZJUTA0N0Rhdz09
회의 ID: 99 9113 1127
암호: 1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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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신학교 Gethsemane Mission Seminary
◉ 2023년도 가을학기 개강(2023년 8월 28일 월)
   종강(2023년 11월 27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30분)
   개교 35주년 학술대회 (2023년 11월 29일 수 오전 10시 ~ 오후 3시) 
    여전도회관(종로5가) 2층 [강사: 윤사무엘, 류재이, 박호용, 박신배]
◉ 2023년 10월 23일 월 수업(가을학기 8주차)
   1교시(에스겔), 원우회의, 점심 및 친교, 2교시(중독회복/한국신학), 
   3교시(테루마/여호와의 절기), 4교시(성경변증, 원어성경강독)
◉장소: 본교 채플실, 네이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연락처: 032-832-0691, 010-9113-1127
[본 신학교의 신앙노선은 성경이며, 청교도의 신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바탕을 두며, 세계 선교를 힘쓰며, 재림하실 예수님을 준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진리, 생명임을 믿고, 말씀과 기도로 성화생활하며 구원의 서정을 이루는데 힘쓴다]
◉등록금납부 은행구좌번호: 농협 3019113112731 겟세마네신학교 한국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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