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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선 최초 근대식 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 헐버트 선교사,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
[윤사무엘목사 칼럼] 헐버트 선교사의 한글 사랑
2023. 10. 12 by 윤사무엘 박사

【뉴스제이】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의 말문에 반포한 날짜가 ‘세종 28년 음력 9월 10일’로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확정하고 1946년부터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가 577주년을 맞이하는 한글날이었습니다.

우리 한글을 세계에 알리는데 공헌하신 분은 미국 선교사 호머 베절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년,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 사학자)입니다. 우리나라에 선교하러 오신 분 가운데 학력이 가장 좋으신 분으로 박사학위가 있습니다. 

23세에 한국에 선교사로 오셨는데(1886년) 7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어학자이며, 한글 띄어쓰기를 최초로 하신 선교사입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영어와 근대식 교육을 담당해줄 교사 파견을 미국에 요청했습니다. 

1884년 여름, 미국 교육위원장 이튼(John Eaton)은 대학선배인 헐버트의 아버지에게 아들 중 1명을 조선에 교사로 파견하는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호머 헐버트는 자원하여 조선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중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인해 계획이 연기되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을 졸업한 후 유니언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던 헐버트는 포기하지 않고 조선과 동아시아에 대해 공부하며 준비를 계속하였습니다. 

헐버트 선교사(왼쪽) / 1942년,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만난 세사람.(왼쪽부터) 호머 헐버트 박사, 아메리안대학교 총장 폴 더글라스(Paul F. Douglas) 박사, 구미위원부 의장 이승만 박사(오른쪽)

조선의 정국이 안정되자 헐버트는 조선에 가기 위해서 1886년에 유니언신학교에서의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벙커(Bunker), 길모어(Gilmore)와 함께 1886년 7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한 호머 헐버트는 곧바로 서울로 향했습니다. 이들은 조선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가 되었고 헐버트는 영어와 지리를 가르쳤습니다. 1888년 3월경부터는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헐버트는 입국 직후부터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는 한국어 학습이 필수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비로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한국어를 배웠습니다. 그의 회고록에는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지 4일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1주일 만에 조선인들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한국어 학습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그는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종 황제는 '육영공원' 학생들을 궁으로 불러 영어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는데, 고종이 영어 문제를 직접 읽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종은 영어를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한글로 발음이 표기된 것을 보고 영어문장을 읽는 모습을 본 헐버트는 별도의 발음기호 없이 직접 영어 발음을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의 우수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헐버트 선교사는 평소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라면서 어려운 한자 대신 한글애용을 권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 정부에서 재정상의 이유로 '육영공원'을 축소 운영하게 되자, 헐버트는 1891년에 교사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 1892년 “한글 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시작으로 한글과 한국 문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03년 미국 스미스소니언협회 연례 보고서에 한글에 대한 우수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헐버트는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사 파송 준비과정을 마치고 선교사 자격으로 1893년 10월 14일,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존 번연의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하였습니다. 그해 8월에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습니다. 

1896년 4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습니다.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습니다. 또한 배재학당에서 가르쳤던 제자 주시경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 마침표, 쉼표를 도입했으며 국문연구소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여러 차례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헐버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습니다. 1909년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갔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독립하였고,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 7월 29일, 40년 만에 방한하였습니다.

윤사무엘 박사

그해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고자 했으나 방한후 1주일 만인 8월 5일에 헐버트는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중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30 여일이 넘는 여행을 통해 쌓인 여독을 이기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이는 그가 생전에 "내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국땅에 묻히고 싶다"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독립장)이 추서됐습니다. 2014년 한글날에는 금관문화훈장도 추서되었습니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국으로 떠나며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첫째 아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윤사무엘 박사(겟세마네신학교 총장 / 로이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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