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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죽으심, 율법의 저주를 당하심/ 우리가 영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요/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영성칼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2021. 12. 21 by 윤사무엘 박사
윤사무엘 박사
윤사무엘 박사

【뉴스제이】  결혼의 비유를 들어 성도가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음을 로마서는 증거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형제들아, (내가 율법을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율법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하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남편이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는 한 그에게 법으로 매여 있으나 그가 죽으면 그녀는 그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로마서 7: 1-2)

남편 있는 여인은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지만,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란한 여자(淫婦)라고 불리겠지만, 남편이 죽은 후에는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란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부관계를 벗어난 남녀의 행위가 음란이지만, 이 경우는 한쪽이 죽었으므로 이전의 부부의 관계 자체가 이미 끝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를 당하시고 율법의 의(義)를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저주를 이미 당한 것과 같고,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에서, 즉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과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에서 자유케 된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의와 선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의 정욕들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몸의 기관들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죄성이 우리의 본성 전체를 지배하였습니다. 간혹 양심의 가책이 있었을지라도 그것은 무시되고 변명으로 무마되었습니다. 

로마서 7장 6절은 “이제는 우리가 붙잡혔던 것에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부터 구제되었으니, 우리가 영의 새로움으로 섬길 것이요 법문의 낡은 것으로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붙잡혔던 것 wherein we were held’은 율법의 규례들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했고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롬6:14에서도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고 합니다. 

또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서 감시를 받았으며, 나중에 믿음이 계시될 때까지 갇혀 있었느니라...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더이상 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고 하며(갈 3:23, 25), 또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자유 안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밝히 증거하였다(갈 5:1).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죄와 방종에 떨어지게 하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 자유는 율법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의와 거룩을 행하게 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삶, 이것이 구원의 방향입니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어 의롭고 거룩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구원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 롬 6:15에서도 “그런즉 어떻게 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인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또 그는 갈 5:13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에로 부름을 받았으니 그 자유를 육신을 위한 계기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고 합니다. ‘영의 새로움으로 in newness of spirit’라는 말에서 ‘영’이라는 말이 언어적으로는 사람의 영이며, 또 법문 혹 의문(儀文, the letter) 이라는 말은 ‘글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조문을 말합니다. 

고후 3:6에서도 영과 글자가 대조됩니다: “또한 그 분은 우리로 새 언약의 능력있는 일꾼이 되게 하셨는데, 이는 법문으로 한 것이 아니고 영으로 한 것이니, 법문은 죽이고 영은 살리기 때문이라.”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옛날처럼 율법 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영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깁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성도에게 성화를 위한 근본적 원동력이 됩니다. 때때로 성도에게 죄와 연약이 있으나 그가 낙심치 않고 더욱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고 의와 거룩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이 자유의 힘 때문인 것입니다.

윤사무엘 박사 (겟세마네신학교 총장 / 겟세마네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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