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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인터뷰
양산시, 부산의 위성도시라 할 수 있어/ 양산, 인구 35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 고신대시절 공수부대 지원, 정신력 키워/ 고신대 신대원 시절, 제자훈련 받고 성장/
[이 사람] 부산양산시 스마일교회 신금용 목사 ... 부산 양산에 '거룩한 웃음' 전한다
2021. 06. 21 by 강부형
신금용 목사

【뉴스제이】 부산이 옆에 끼고 있는 양산시가 있다. 1996년 시로 승격된 부산의 위성도시라고 할 수 있다.

신도시라 하지만 역사로 보면 부산만큼이나 한참을 올라간다. 삼국시대에는 <삽량주>로 불렸고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는 <양주>라 했다. 조선 시대에 와서야 (1413년) <양산군>으로 이름을 변경하고 이 명칭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신도시라 하지만 사실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지역이다.

논 밭이 즐비하던 곳이었는데 택지 개발과 함께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부산대 대학병원이 들어서는 등 발전을 거듭해 지금은 인구 35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했다.

지난주 양산을 방문해서 한 인물을 만났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분의 초청으로 양산을 방문한 것이다.

2박 3일을 붙어 지내며, 이런저런 각자 살아온 인생사를 주고받았다. 이 분 한마디로 친화력 최고다. 겨우 만난 지 이틀 지났을 뿐인데 20년은 알고 지낸 느낌이 드는 것은 웬일인가! 

이 분 직업이 목사인데 교회를 개척하고 그동안 목회를 해온 과정을 듣다보니 나와 유사점이 참 많다. 옷이 없어 주일 설교하기가 그렇다고 하니 옷은 걱정 말라며 자신의 옷을 입혀주고, 본래 주일 저녁 설교만 하기로 했는데 주일 오전 설교까지 맡겨준다. 결단력과 고집이 마치 내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정식 인터뷰는 아니고 틈틈이 나눈 대화를 기억으로 소환해내며 신금용 목사의 인생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싶다.

교회 내부 리모델링 공사를 교인들과 직접 밤을 새우며 작업했다고 한다.

고신대 입학과 공수부대
1982년 고신대학 신학과에 입학한다. 

“고신대 합격하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옛날로 말하면 장원급제한 기분이랄까요?”

그리고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훈련 힘들기로 소문난 특전사인 공수부대로. …

“신앙 없었으면 자살했을 겁니다” 

이 한마디가 특전사의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육체적으로는 극한으로 몰아넣는 한계점을 넘는 고통이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단련할 수 있는 축복의 시기이기도 했다. 꿈속에서 세계 지도를 보며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도 품게 되었고 덤으로 상관들은 그를 새끼 목사라 불러줬다.

힘든 군 생활 중에 선교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었지만 막상 전역 후 전혀 의외의 하나님 음성을 듣게 된다.

‘해외 선교사로 나가지 말고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보내라’

처음에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음성이었다. 선교사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정말 선교사로 나가고 싶었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었나 봐요. 선교사를 파송하고 돕는 교회를 개척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지요."

그리고 마침 1987년 고신대 신대원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제자훈련팀에 들어가 제자훈련을 받게 된다. 고신대 신학대학원장을 지낸 김순성 교수를 비롯한 12명의 훈련생 중 막내였다. 이 제자훈련을 그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해준 밑거름이라고 생각한다.

이경애 사모는 부산극동방송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이면서 부산대학 국제전문대학원에서 국제지역학을 가르쳤던 교수이기도 하다. 최고의 동역자 아내와 함께      ⓒ신금용

신대원을 졸업한 후 1998년 5월, 당시의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에 교회를 개척했다. 개척 당시 교회 이름은 <무지개교회>라 했다. 지금이야 부산대학교 병원이 들어서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지만 당시만 해도 양산은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이었다.

교회를 개척할 때 고신대 학생들이 목사님을 돕고 목회를 배우겠다고 달려왔다. 사례비는커녕 교통비도 제대로 줄 수 없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동역을 했다.

“동역자, 교인들과 날마다 동네를 돌며 전도를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어요. 사업에 실패하고 양산으로 몰려온 사람, 알코올중독자, 도박꾼, 걸인, 심지어 비구니나 무당도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하고 출근하는 이들을 위해 빵과 커피를 나눠주고 양산 시내의 공원과 학교, 지하철역 근처에서 뻥튀기를 돌렸다. 지역 주민들을 향한 전도뿐만 아니라 늘어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도 손길을 내밀었다.

양산에 위치한 공장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았다. 네팔, 스리랑카, 필리핀, 몽골 등에서 온 근로자들로 넘쳐났다. 교회는 한글 교실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고 음악회를 열어 이들을 위로했다. 교회는 성장을 거듭했고 교인 수는 250명에 이르렀다.

신금용 목사는 교인들과 직접 밤을 새우며 교회내부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고 한다.       ⓒ강부형<br>
신금용 목사는 교인들과 직접 밤을 새우며 교회내부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고 한다.   강부형 목사(좌)와 신금용 목사(우)     ⓒ강부형

선교지로
신금용 목사는  2005년 3월 1일, 교회를 부교역자들에게 맡기고 가족과 함께 선교지로 떠났다. 선교에 대한 열정이 그를 국내에만 머물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교지에서 처음엔 통역을 두고 설교를 하다가 어느 날부터 영어로 직접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복음 전하라고 주님께서 주신 은사 같아요. 어느 날 영어로 직접 설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역을 거치니까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물론 처음부터 잘 하지는 못했지요.”

그렇게 선교지에서 무려 4년을 지냈다.  담임목사의 부재 속에 부교역자들만 죽어날 판이었다. 더 이상 선교지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2008년 국내로 복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2년 전 '무지개교회'의 이름을 ‘스마일교회’로 변경했다. 무지개의 의미가 성경에서도 좋게 사용되지만 사회적으로 무지개를 보는 시선이 왜곡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강부형

무지개교회에서 스마일교회로
2년 전 '무지개교회'의 이름을 스마일교회로 변경했다. 무지개의 의미가 성경에서도 좋게 사용되지만 사회적으로 무지개를 보는 시선이 왜곡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이름은 바뀌었어도 선교에 대한 그의 열정은 변함이 없다.

“선교만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도 선교 아니겠습니까?”

그가 선교에 쏟아붓는 열정은 교회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선교사님을 후원한 것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문에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난 교인들도 있단다. 선교에 힘을 다한 보답일까, 최근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미국의 한 교민이 신 목사의 사역 소식을 전해 듣고 교회 건축을 돕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조건 없이 선교사님들을 도왔더니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보내신 것이다.

​가족으로 2남(명기, 요한) 2녀(예림, 하림)의 자녀와 이경애 사모가 있다. 이경애 사모는 부산극동방송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이면서 부산대학 국제전문대학원에서 국제지역학을 가르쳤던 교수이기도 하다.  사모님, 교인들 자랑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신 목사 본인은 현재 필리핀 선교 단체인 <FACTS> 대표와 서울 장지동에 본부가 있는 G.P 선교회 부이사장으로 섬기고 있다. 

부산의 양산에서 교회를 찾는다면 스마일교회와 신금용 목사를 꼭 한 번 찾아 보시라.

 

강부형 목사 (도서출판 '책과 사람' 대표 / 하나금융선교회 지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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