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 23,000원은 ‘사랑과 눈물의 숫자’ ... "두번째 부모님, 섬기는 사랑합니다"
[사는 이야기] 23,000원은 ‘사랑과 눈물의 숫자’ ... "두번째 부모님, 섬기는 사랑합니다"
  • 정윤모
  • 승인 2019.12.17 10: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납북 이산가족 정윤모의 사는이야기 3]
대학교 근무 당시, 학생들과 봉사 나가 만남/
비닐하우스 움막 노인들을 위한 연탄배달 봉사/
변장하고 계신 예수님 봉양하고 있다는 심정/
‘옵서버’ 시험합격 배 타게 돼... 못 찾아 뵐 환경
【뉴스제이】 나의 육신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80세의 연세로 천국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에게는 또다른 부모님이 계시다. 두 분 모두 목사님이신데 이제는 은퇴하셨고, 연로하셔서 침상에 누워 계신다. 아버님은 금년 우리나라 나이로 100세, 어머님은 89세가 되셨다.
 
두 분의 고향은 황해도이신데, 6.25 직전에 공산군이 고향을 점령해 지식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핍박했다고 한다. 그래서 야밤에 서해안에서 쪽배를 타고 사선을 넘어 남하하셨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했고, 국군에 지원한 두 명의 아들은 전사했다. 그래서 지금은 전사한 아들의 ‘6.25 전쟁 유공자 보상금’ 수급자로 살고 계신다.
 
2012년, 내가 대학교 총무처에 근무 할 때 학생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나간 적이 있다. 그 때가 겨울철이고 주말이었다. 학교 근거리 ‘비닐하우스 움막에 두 노인들이 어렵게 살고 계시다’는 군포시의 제보성 연락을 받고, 비닐하우스 움막 노인 분들을 위해 연탄배달 봉사를 나갔다. 
 
학생들과 함께 비닐하우스 움막 노인 위해 연탄배달 봉사

당시는 두 분이 몸이 좀 불편하시긴 했어도 활동을 하실 만큼 건강하셨고, 아버님은 꾸부정하셨어도 걸어 다니시며 활동하실 만큼 건강하셨다. 그런데 내가 봉사를 다녀온 후 몇 년이 지나 어머님이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그리고 아버님도 여러가지 병으로 두 분이 병원에 같이 입원해 계신 적이 많았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찾아뵙지는 못했어도,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연락을 받으면 꼭 찾아가 병 문안를 드리곤 했다. 

그런데 몇년 전부터는 거동을 못하시고, 군포시에서 제공한 한 칸방 집에서 두 분이 마주보고 침상에 누워 계시다. 그래서 나는 매주 월요일 오전, 항상 빠짐없이 찾아뵙고 두 분을 살피고 있다. 나머지 날은 군포시에서 제공하는 간병인 선생님들의 의료봉사서비스를 오전 오후로 받고 계셔서 안심은 된다.

어머님은 말도 잘 못하시고, 두 분이 대각선으로 침상에 누워 계시고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를 관찰(?)하고 계시다. 거동을 전혀 못하시니까 밤에도 현관문은 24시간 잠그지를 못 하신다. 

나는 대학교 총무처를 퇴직하고 도매업을 하고 있다. 아담한 승합차 ‘다마스’로 배달을 하는 것도 내 몫이다. 그런데 내가 두 분을 찾아뵈는 월요일에 가끔 “우리 수양아들, 차 기름값 해야지”하시며, 꼭 ‘23,000원’을 주신다. 그것도 양말 속에 꾸깃꾸깃 접어 넣으신 돈이다. ‘왜 23000원 주실까’ 생각해 봤다. 아마 누구에게 내가 타는 다마스로 양부모님 집까지 오려면 연료 가스비가 얼마 정도 드는지 물으셨던 것은 아닐까.  

양아버지와 얼굴이 닮았다.

그런데 내가 원양어선에 승선하여 해양생태계 및 바다생물을 관찰하는 일을 주로 하는 ‘바다 지킴이’인 ‘국제 옵서버’ 2019년 하반기 시험에 합격했다. 그래서 22년간의 대학교 교직원 생활을 정년으로 마감하고 잠시 도매업을 하고 있지만,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됐다.

내가 1978년에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어업학과를 졸업했으니 전공대로라면 지금까지도 계속 선상과 수산 근처에 있음이 마땅하나 하늘의 뜻이 계셨던지 다른 길을 걸어왔다. 과거 40년 전 약 5년간의 승선 경험이 있었기에 '다시' 바다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에게 죄송스런 마음을 담아 입을 열었다.

"아버님! 저 이제 자주 찾아뵙지 못할 거예요. 배를 타고 멀리 나가요. 그래서 차를 팔고 없으니까 기름값 안 주셔도 돼요"

그러나 아버님은 아무런 말없이 여전히 양말에서 꾸깃한 돈을 꺼내서 주신다. ‘안받겠다’고 하면 노발대발하시며 서운해 하신다. 물론 나도 찾아뵐 때마다 빈손으로 안가고 주신 돈에 더 보태서 문안비용으로 섬기기는 하지만, 주시는 ‘23,000원’이 항상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나에게 ‘23,000원’은 ‘사랑과 눈물의 숫자’다. 

얼마 전에는 나를 ‘수양아들’에서 ‘양아들’로 승격(?)시켜 주셨다. 심장고통으로 위급하신 적이 있으셨는데 그때 찾아뵈었을 때 나에게 "아들아! 내가 갑자기 무슨 일이 있으면 양아들이 되어 있어야 나를 더 잘 도울 수 있고, 더 유리하다"라시며 해석의 말씀도 해 주셨다.

내가 배를 타고, 큰 대양으로 나가야 될 환경이니, 미리부터 군포시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으로 케어를 하고 있다. 그래서 나도 그렇고 양부모님도 그렇고 ‘서로 애타는 보고 싶음’을 가지는 환경이 될 것이라서 눈물이 난다. 양부모님에게는 고아원에서 데려다 키운 수양딸 한 명 있지만 힘들게 살고 있고, 더구나 사위가 두 분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입혀 아직도 100세 되신 연세에도 노여움을 가지고 계셔서 수양딸의 케어도 어렵다.

몇일 전 장모님이 소천하셔서, 85세 되신 장인어른도 공양해야 한다. 장인 어른은 장로님으로 신앙심이 깊으신 분이다. 그래서 이젠 두 분의 아버님이 내 앞에 있게 됐다. 아직도 양아버님은 내가 처음 연탄봉사를 갔을 때, 대학교 총장님이 특별히 나를 보내서 두 분을 섬긴 줄 알고 총장님에게도 늘 감사하고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 것이다.

나는 누워계신 양부님을 뵐 때마다 마태복음 25장의 지극히 작은 자를 섬겨야 하는 그 이유에 대한 말씀을 되새기며, 내심 “변장하고 계신 예수님을 제가 봉양하고 있다”는 심정으로 찾아뵐 때마다 신앙과 인격의 성장함을 느낀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윤모 안수집사 (국제 옵서버 / 담안선교회 감사)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