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우중 회장 어머니의 신앙과 자녀교육
고(故) 김우중 회장 어머니의 신앙과 자녀교육
  • 발행인 나관호
  • 승인 2019.12.11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자식들을 위해 하루 4번씩 기도/
“단정하게 앉아서 식사하라”/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마라”/
기독교적 윤리강조...‘희생·봉사정신’심어줘/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일요서울

【뉴스제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의 명언을 만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83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의 별세와 더불어 김우중 전 회장의 어머니 전인항 여사의 기독교적 자녀교육법이 수면 위로 오르고 있다.

10여년 출간된 『한국 최고 경영인을 길러낸 어머니의 힘』(한결미디어)은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대기업 총수들의 어머니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어떻게 자녀들을 교육했기에 한국 최고의 CEO로 만들었을까? 다른 위대한 보통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는 어떻게 다를까? 이런 잘문에 대한 답을 말하고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창업회장의 어머니 전인항 여사의 이야기를 열어보자.

 

하루에 네 차례씩 기도하고 찬송한 어머니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어머니 전인항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정말 내 어머니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먹고살기도 어렵던 그 힘든 시절을 헤쳐 오면서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우리들을 대학까지 가르치셨다. 어머니의 일생은 한마디로 자식에 대한 희생과 헌신의 삶이었다. 내가 강조하는 경영철학 가운데 희생정신은 어머니에게서 영향 받은 바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께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하루에 네 차례씩 기도하고 찬송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어머니 전인항 여사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탄광을 운영하는 대부호 집안의 4남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다.

전인항 여사가 살던 마을에는 숭덕학교란 곳이 있었다. 전인항 여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된 계기도 이 학교를 통해서였다. 어느 날 소녀 전인항은 이 학교 여선생이던 미국에서 온 김한나 선생님의 찬송가 소리를 듣고 바로 매료됐다.

그러나 워낙 엄격했던 전인항 여사의 할아버지는 손녀의 교회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고야 말았던 소녀 전인항은 할아버지의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 울타리 구멍을 통해 교회와 숭덕학교를 다녔다.

그만큼 전인항 여사는 자신이 원하는 일은 억척스러울 정도로 해냈다. 이런 억척스러움은 훗날 남편이 납북돼 홀로 자식을 키워야만 했던 에게 큰 힘이 됐다.


정동교회에서 혼례...김우중도 정동교회서 결혼식

숭덕학교 2학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전 여사가 다니던 학교도 폐쇄됐다. 하지만 전 여사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홀연 단신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전 보육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영변으로 돌아와 유치원 선생과 소학교 피아노 선생을 지냈다. 이태영 전 가정법률상담소 소장이 이때의 제자다. 이태영 전 소장은 생전 전 여사를 이렇게 회상했다.

“항상 웃는 얼굴, 아름다운 몸맵시, 사뿐사뿐 걷는 걸음걸이가 마치 천사처럼 보이는 매력 만점의 처녀 선생님이었다. 형부의 소개로 김용하 선생님과 결혼해 영변을 떠나시던 날에는 친구들이 모두 울었다”

애초 전인항 여사는 결혼보다 기독교에 귀의하고자 다짐했었다. 이화여전 선배인 김활란 여사처럼 여성 선각자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평소 존경하던 선교사가 “신앙은 결혼해서 자녀를 기르고 삶을 즐기면서도 자신에 충실하다면, 늘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권면이 마음을 돌렸다.

형부 소개로 만난 제주 출신의 남편 김용하씨는 도쿄대학 법정대 예과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를 나온 엘리트였다. 두 사람이 백년가약을 맺게 된 것은 1930년 정동교회에서였다. 전 여사의 두 아들 덕중과 우중도 이곳에서 혼례를 치렀다.

 

“어려운 아랫사람 형편을 늘 염두에 두라”

전인항 여사의 신혼생활은 무척 행복했다. 어린 우중을 안고 남편과 함께 중국 신경으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평온했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남편 용하씨가 북한군에 끌려간 것이다.

전 여사는 아들과 함께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가 수많은 시체를 한 구 한 구 뒤지며 남편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하루아침에 집안을 이끌어야 할 가장이 된 전 여사는 홀로 어린자식들을 키웠다. 이때 자녀들의 나이는 관중(전 대창기업 회장)이 열여덟, 덕중(전 교육부 장관, 아주대 총장)이 열여섯, 우중(전 대우그룹 창업회장)이 경기중학교 1학년이었다.

이러한 와중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전 여사는 부산의 한 방직회사에 취업했다. 여공들의 젖먹이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이때 체험을 통해 전 여사는 “어려운 아랫사람 형편을 늘 염두에 두라”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자녀들에게 기독교적 윤리 강조

전 여사는 자식들에게 기독교적 윤리와 도리를 가르치려 무던히 애썼다.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이 “단정하게 앉아서 식사하라”였다. 이것을 지키지 않을 때에는 자식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두 번째 강조한 것은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마라”였다. 가난하고 어수선하던 시절 전 여사는 자식들에게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일깨워줬다.

전 여사는 자식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었다. 때론 자식들을 깨우치기 위해 회초리로 자신을 벌하기도 했다. 자식을 법도 있게 키우려 한 의지에서였다. 훗날 회초리의 의미를 깨달은 자식들은 행동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전인항 여사는 어린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이처럼 전 여사의 삶은 ‘신앙으로 만든 큰 테두리’ 속에서의 헌신된 생활 그 자체였다. 아들과 며느리들이 교회의 장로나 전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 또한 이런 전 여사의 영향이 컸다.

전 여사는 자식들이 모두 자기 분야에서 평균적으로 성공해야 한다고 여겼다. 1960년 무렵 맏아들 관중이 어렵사리 마련한 집도 막내 성중(델코 회장) 유학비를 위해 과감히 처분했다.

전 여사의 이 같은 간절한 기도와 간구 때문일까. 자식들은 모두 그녀의 바람대로 평균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  [자료제공 : 한결미디어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