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치기 어머니의 헌신을 닮아 살아간다
종치기 어머니의 헌신을 닮아 살아간다
  • 백승억
  • 승인 2019.07.07 18: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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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억 원로목사의 고백 〈2〉]
가정예배에 잘 참석한 나와 셋째 형님만 목사가 되었다.
아버지는 경찰출신이라는 이유로 인민군들이 무자비하게 학살
교회 종치기 어머니 닮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우리 가문
기도의 사람 백승억 목사

【 뉴스제이 】 기도의 어머니께서는 6.25전쟁 때 아버지와 사별하셨다. 당시 40대 나이셨다. 아버지가 경찰출신이라는 이유로 후퇴하는 잔여 인민군들에게 철사로 묶여 당진 시곡리 귀밀마을 깊은 산속에서 야밤에 삽과 낫, 꽹이로 무자비하게 학살당하셨다.

다음 날, 새벽에 귀밀마을 사람의 말을 듣고, 학살 현장을 찾아간 어머니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이 흐트러진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셨다. 어머니의 고생길이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기도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지친 마음을 토로하셨다. 특별히 금술이 좋으셔서 아버지를 의지하며 사셨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인생 최대의 아픔이었다. 

어머니는 7남매 중 장남인 큰 형님을 결혼시켜 백부의 양자로 보냈다. 그리고 당시 누님이 출가를 해서 5형제가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소천은 어머니가 다섯 아들들의 생계를 위하여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시골 마을 가가호호를 다니며 장사를 하시게 만들었다. 보따리 장사는 몸도 마음도 어려운 장사다. 그 당시 어머니와 5형제의 고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나또한 온갖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께 앞길을 맡기고, 13살부터 홀로서기를 했다. 신문배달, 버스정류소 매표원, 빌딩청소원과 노상에서 앨범 장사도 했다. 그리고 우국기도원에서는 기도하며 아르바이트도 했고, 인왕산 아래에서 물을 길어 산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다 주고 용돈을 받았다. 옛날을 떠올리니 눈물이 적셔진다. 당시에 아무도 나에게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한 때는 양자로 입적되어 집을 떠나신 형님 집에서 거의 2년반 동안 작은 머슴으로 농사일을 하기도 했다. 큰 머슴이 잠자는 허름한 방에서 같이 검정 이불을 덮고 잠을 자면서, 큰 머슴을 따라 벼를 심고, 추수를 하며 농사일로 어린 시절을 지내야했다. 고달픈 시간이었다. 그때 용돈 1원도 받은 적이 없고, 밥만 먹고 일만 하는 신세였다. 그러나 하나님 은혜로 잘 이겨낼수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너무나 눈물겨워 글을 쓰기 어렵다. 감사와 고난의 시간이 합쳐진 눈물이다.

그런 고난뿐아니라 어린 나이에 친구들에게 왕따를 경험했던 나였다. 그렇게 고난과 고달픔 그리고 따돌림을 당했던 어린시절 경험을 가진 목사이다보니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과 다른 목사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 사회 속의 어려운 사람과 약자를 바라보는 눈이 남다르게 되었다. 감사한 일이다. 

2001년 9월 20일 목요일, 서산신문중에서
2001년 9월 20일 목요일, 서산신문 중에서

글을 쓰다보니 옛생각이 난다.  수십여년 전 일이다. 기하성 충서지방회에 소속된 교인이 10여명 쯤 모이는 합덕순복음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 조OO 목사는 당시 나에게 부담을 주는 목사였다. 스쳐지나가기라도 하면 얼굴을 마주치기 싫을 정도로 심적 갈등이 컸다. 그런데 그 목사가 교통사고를 내고 홍성교도소에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을 듣자 마자 얼굴도 쳐다보기 싫을 정도로 부담 준 목사였지만 긍휼한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마침, 홍성교도소 교정협의회 회장이었던 나는 구속된 조 목사의 부인을 모시고 홍성교도소에 들어가 특별면회를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 마음으로 그 사모에게 남편 목사의 빈시간 동안 생활에 보탬이 되었으면해서 1백만원을 드렸다. 전후 사정을 아는 일부목회자들은 "그런 사람에게 돈을 왜 줘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져 예수님이 주신 긍휼의 마음에 순종하고 싶었다.

그리고 당시 서산에서 유일하게 지역신문 '(주)서산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지역사회와 복음화를 위해 힘을 쏟았다. 최고 부수 1만 7천부(12면 /컬러 4면)까지 발행된 지역언론 대표정론지로서의 위치를 튼튼히 했다. 처음에는 제호가 '서산밝은신문'이었다. 약자를 보호해주는 기사와 밝은 기사가 가득한, 즉 마음을 풍요롭게하는 신문을 창간해 20여년간 운영했다. 그 기간동안 저소득층 학생과 미화원 그리고 효부, 모범경찰, 소방 공무원들에게 '서신(瑞新)상'을 수여해 지역 사회를 밝게 했다. 이 모든 것은 서산순복음교회 제직들과 가족들의 기도와 후원이 바탕이 되어 만든 작품이었다.

또한 서산신문이 연말에 지역민 대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기위한 성금을 모았는데, 음으로 양으로 우리 성도들의 도움이 컸다. 5년간 약 1억 7천만원의 성금이 생계가 어려운 이웃과 청각장애인, 시각 장애인들에게 전달되었다. 지난 시간이지만 모든 영광 하나님께 다시 올려드린다.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진 서산이룸교회
기도와 헌신으로 세워진 서산이룸교회
조용기 목사님 초청 성회 장면
조용기목사님 초청 성전헌당예배 (이날 여의도순복음교회 장로, 제직 관광버스 20대 전세내 참석)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 기지시감리교회에서 새벽과 낮, 밤에 종치는 권사님이셨다. 시계처럼 정확히 종을 치셨다. 어머니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정예배를 인도하셨는데, 두 아들만 열심히 참석했다. 그 두 아들이 셋째 형님 백승호와 막둥이인 나, 백승억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예배에 잘 참석한 나와 셋째 형님만 목사가 되었다. 형님과 나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증경총회장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7형제는 어머니의 희생 앞에 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곤 했다. 기도의 어머니는 이 땅의 마지막 날을 위해서도 준비기도를 하셨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 중 하나는 “하늘 아버지가 부르시는 순간까지 목회하는 후손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였다.

교회 종치기셨던 어머니는 기도하신대로 건강하게 사시다가 예수님 품에 안기셨다. 평소에 꽃을 좋아하신 어머니를 위해 빈소인 ‘잠실 아산병원 장례식장 특실 2호실’은 130여개의 조화로 꾸며졌다. 나의 지인들이 보내준 화환이었다. 교회 종치기 어머니는 그렇게 조화 향기 속에서 가문의 영광 열매들인 자손들의 환송을 받으며 예수님 품에 안기셨던 것이다.  

신혼집에서 처음 시작한 교회 앞에서

자랑스러운 믿음과 기도의 어머니는 이 땅에서의 고생을 뒤로 하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천국에서 자손들을 위해 기도하시리라 믿는다. 기도가 어머니의 평생 사명이었기에.....천국 종이 있다면 어머니는 종을 치고 계실 것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엉엉 울고 있다. 어머니 뵈올 날을 생각하며..... 그날이 언젠가는 다가올 것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니까.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더 이상 못 쓰겠네~~ 엉~ 엉~”

흐르는 눈물이 속옷까지 적시고 있다. 기쁨과 환희의 눈물이다. 예수님을 생각하니 더더욱 감사의 눈물이 흐른다.

교회 종치기 어머니를 닮아 작은 일에 충성하는 우리 가문과 가족들이 있어 행복하다. “어머니 닮아 작은 일에 헌신하겠습니다,”


백승억 원로목사 (서산이룸교회, 기하성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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