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우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기부문화'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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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관호
  • 승인 2019.06.2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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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목사의 행복발전소 82]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 b)
미국과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비교하면
‘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인’은 자신들 스스로 부른 이름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의 선비 세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가치관이 높았다.

【뉴스제이】  사람들은 그가 속한 사회의 지배층 인사들에게는 일반인들보다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기대가 충족될 때 우리는 상류 계층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는 철학과 도덕성을 갖춘 진정한 상류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되면서,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더더욱 귀하게 여겨지고 인용되곤 합니다.

이 말은 본래 ‘귀족은 귀족다워야 한다’는 프랑스어 속담 “Noblesse oblige”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금은 “사회의 지도적인 지위에 있거나 여론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정신적 의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 년전, 주식 투자의 신화를 만들어 온 세계 2위 부자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의 85%인 370억 달러 어치 주식을 자선단체에 내놓기로 했습니다. 기부금으로 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버핏의 총재산은 그해 발표 당일의 주가로 계산하면 440억 달러였습니다. 버핏은 기부금의 80%가 넘는 300억 달러를 빌 게이츠 회장 부부가 만든 ‘빌 앤드 멜린다 게이츠재단’(www.gatesfoundation.org)'에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빌 게이츠도 놀랐습니다.

뉴욕 타임스는 “버핏의 기부금은 유네스코 1년 예산의 61배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세계가 놀란 것은 기부금 액수가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의 정신 때문입니다. 더구나 세계 최고 갑부인 빌 게이츠(Bill Gates)와 손을 잡았다는데서 더 관심을 끌었습니다. 세계 1, 2위 갑부인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설립자 겸 CEO를 지낸 ‘빌 게이츠’(Bill Gates)와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을 지낸 ‘워렌 에드워드 버핏’(Warren Edward Buffet)이 뜻을 합쳐 초대형 '자선 합작회사'를 가동한 것입니다.

빌 게이츠 또한 500억 달러에 이르는 재산 중 자녀들을 위해선 1000만 달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사회사업에 내놓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습니다. 그는 2008년부터 회사 일에서 손을 떼고 재단업무에만 주력하며 기부사업에 초점을 맞추고 살고 있습니다. 부를 사회에 되돌려줄 책임이 있고 또 최선의 방식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입니다. 세계 제1의 갑부와 세계 제2의 갑부가 자선사업에서 사상최대의 합병을 이뤄낸 셈입니다.

서양 전통으로 보면, ‘사유 재산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동렬(同列) 또는 그 연장선상의 핵심적 인간 권리로 취급돼 왔습니다. 사유재산권을 신성시(神聖視)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사회에서 돈을 벌 때는 악착같았던 기업가들이 성공한 다음에는 사회를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 미국의 기업가 정신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나눔의 삶’이 몸에 각인되어있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존 록펠러(John Rockefeller), 헨리 포드(Henry Ford), 폴 게티(Paul Getty) 등 그 사례를 꼽자면 끝이 없습니다.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의 활력과 건강성이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돈을 벌 때의 기록만 있고 그 이후 돈을 어떻게 썼는지를 알 수 없는 기업문화와 여론의 압력을 통해 사유재산의 사회헌납을 강요하는 전근대적 국가권력이 병존(竝存)하는 것이 한국의 자본주의입니다. 그런 한국의 풍토이기에 버핏과 게이츠가 이뤄낸 자선합작(慈善合作)이 기적처럼 보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면 사실 우리나라 조선의 선비 세계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가치관이 높았었습니다. 선비 갑부들은 가난한 이웃을 위해 경작할 땅에 대한 지세를 조금만 받았고, 마음대로 쌀을 퍼가도록 만든 뒤지를 대문 앞에 두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의식 있는 선비 갑부들은 전쟁이나 기근 등 백성과 나라에 위기 있을 때마다 곡간을 열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마음껏 실천했습니다. 조상들의 정신이 현재의 부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모든 부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숨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맨들이 있으니까요.

조선시대 일반 백성은 ‘향약’(鄕約)이라는 향촌의 자치규약에 따라 서로 도왔습니다. 이율곡 선생이 만들었다는 해주향약의 ‘환난상휼’(患難相恤)을 보면 ‘상호부조’(相互扶助) 성격이 강합니다.

- 마을 주민 집이 불로 소실되면 집당 장정 한 명씩 보내 하루 먹을 양식과 짚 세 다발 ·통나무 한 그루·새끼 열 발씩을 들고 봉사한다. - 도둑을 맞으면 양식이나 숟가락 밥그릇을 배분해 채워준다. - 환자가 생기면 의원을 모셔 오고 경비는 나눠 낸다. - 모든 식구가 앓아 농사를 짓지 못 할 때는 사람을 모아 대신 지어준다. - 가난으로 노처녀가 생기면 힘을 모아 시집을 보내준다. - 가난으로 끼니를 못 이으면 집집마다 밥을 넉넉히 지어 나눠 먹었다.

이런 것만 봐도 우리 전통은 인정이 메마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향약’은 자치규약이기 때문에 법으로 규제하는 것보다 강제성이 적지만 자율성을 믿는다는 점에서 효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런 백성들의 정신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홍수나 화재로 인한 이재민들의 어려운 소식이 전해지면 어린이부터 할아버지까지 전 국민의 온정이 몰립니다. 돈이 많은 사람보다 평범한 사람들이 앞장서서 모금에 참여합니다. 유독 정이 많은 우리 민족은 슬픈 사연을 알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사랑의 리퀘스트’와 같은 TV 프로그램과 지난 1996년부터 시작된 ARS 모금과 신문방송의 기부문화가 성공한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와 미국의 차이점은 거부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미국의 경우 월마트, 듀폰, 보잉과 같은 대기업들의 기부금만 매년 2000만~1억 달러를 웃돌고 있습니다. 빌 게이츠(Bill Gates)는 물론이고, CNN을 설립한 언론 재벌 테드 터너(Ted Turner), 금융인이자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George Soros) 등의 거부들도 수시로 교육기관과 공익재단에 천문학적 금액을 내놓습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이웃과 이재민 뿐만아니라, 사회 곳곳에 기부함으로서 ‘부의 사회환원’으로 나라를 이끌어가는 측면도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이 더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기부문화가 꽃을 피운 근본 이유는 카네기, 록펠러, 포드처럼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공익활동에 앞장선 훌륭한 모델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자라나는 세대들에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모습이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등에게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또다시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한 20, 30대 벤처기업가들에게 연결됩니다. 부시 대통령 시절, 유산상속세와 증여세 폐지를 추진하다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에 부딪힌 적이 있습니다. 빈부 격차의 심화와 기부활동의 위축 등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다워야 한다’는 개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하고, 기업인은 기업인다워야 하고, 정치인은 정치인다워야 하고, 교육인은 교육인다워야 하고, 종교인은 종교인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기독인은 더더욱 그리스도인다워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그리스도인’라는 칭호를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칭호보다 갚진 것이 있으랴.” 기부문화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복음전파의 한 방법입니다.

사도행전.... 제자들이 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즉 ‘크리스천’으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말, 행동, 활동이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문자적인 뜻은 “그리스도의 파에 속하는” 또는 “그리스도의 추종자”입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 b)

그 전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르는 특별한 이름이 없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형제, 제자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자신들이 부른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부른 호칭이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과 달랐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만약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부르는 이름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 ‘크리스천’이라고 새로운 이름으로 부른 것은 그들의 삶이 무언가 세상 사람과 다르기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기쁨입니다. 보람입니다. 영원히 남는 영원한 기록입니다. 또한, 후대를 위한 가르침이며 대를 이어 가야 할 가치관입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더더욱, 가진 자들이여,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니까요.” 

 

나관호 목사 ( 뉴스제이 발행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치매가족 멘토 / 칼럼니스트 / 문화평론가 /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강의교수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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