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가시고기 아버지가 남긴 세가지 교훈
[나관호목사 칼럼] 가시고기 아버지가 남긴 세가지 교훈
  • 나관호
  • 승인 2020.09.19 0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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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 목사의 행복발전소 120]
아버지 유언이 나를 만들었다/
“정직해라.입장 바꿔 생각해라./
가난한 사람 돌봐라”/
인생이란 수시로 입장이 바뀌는 것/
아버지는 누누이 강조하셨다/
"아버지! 당신은 나의 숨결 속에 살아 있고, 눈물 속에 추억을 만드는 마술사입니다."

【뉴스제이】  늘 아버지의 작은 유품들을 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하곤 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이사하면서 아버지의 유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시계, 벼루, 양복과 외투도 사라졌다. 누군가의 손에 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유난히 자식 사랑이 지극했던 아버지, 동네에서도 유명했던 아버지의 '자식 사랑병'은 화젯거리가 될 정도였다. 삶 자체가 자식 중심일 정도로 아버지는 가시고기처럼 자식을 사랑하셨다. 아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주려고 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식을 지키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직도 내 가슴속에 살아서 나의 인생 가치관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버지는 약주를 드시면 나에게 항상 세 가지 교훈을 말씀하시곤 했다.
 
"정직해라. 입장 바꿔 생각해라.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어라.“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며 늘 한결같은 가르침을 강조하곤 하셨다. 특히 인생이란 수시로 입장이 바뀌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어린 마음에도 그 교훈은 마음에 깊이 새겨 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의 교훈은 항상 내 마음속에 살아 움직인다.

▲ 소풍에 따라오신 아버지(왼쪽)와 선생님(오른쪽) 앞줄 선생님 옆, 흰스타딩 신은 아이가 나 © 나관호

직해라

학교를 졸업하고 문구회사에 취직하셨다. 그 회사는 직원들이 모두 합숙을 해야 했는데 당시에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사장 부인이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가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가 있었지만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랬더니 주위 동료들은 키득거리며 아버지를 비웃었다. 사장 부인이 아버지를 불러냈다. 동료들은 그런 모습에 손가락질까지 하며 더더욱 아버지의 행동이 어리석다는 듯이 조롱했다. 사실 사장 부인이 이가 있는 사람을 찾은 것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겨울 내복 두 벌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승진했고, 몇 년 후에는 문구공장의 책임자가 되셨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일본 유학을 주선할 정도로 인정받으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실 수 있었다. 그 당시 만년필 속에 독립자금을 넣어 전달했던 이야기도 들었다.

아버지의 정직한 행동은 해방 이후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사업을 할 때도 이어졌다.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나라의 녹을 먹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마음만 먹으면 공출되는 쌀을 개인이 착복할 수 있는 구멍이 많았다. 조합장인 아버지에게 그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쌀 한 톨도 집으로 가져오지 않으셨다. 몇 년 후 시행된 비리 감사에 아버지만 걸리지 않았고, 그 결과로 표창을 받으신 일을 늘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입장 바꿔 생각해라

6.25전쟁 때 동네 유지와 지식인들이 모두 공산군에게 잡혀 중학교 강당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도 예외가 되실 수는 없었는데, 아버지를 찾아낸 것은 어느 부잣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다 공산당원이 된 사람들이었다.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아버지를 구해 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역시 머슴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그 집에 갔을 때, 그 사람 동생이 소아마비로 아픈 것을 보고 한의사 친구에게 말해 한약을 지어다 준 작은 친절이 아버지의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생각을 가끔 하신다며 내 손을 꽉 잡으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끼던 축구공과 야구 글러브가 없어졌을 때 다른 아이들이 내 것을 가지고 있어도 훔쳐간 것을 본 것이 아니면 그냥 잊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약해 보였고 화가 났다. 결국은 그 집 개에 물려 피를 흘렸다. 그래도 아버지는 글러브를 찾아 주시지 않으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 세를 살다가 집세를 내지 않고 도망간 사람을 이해하셨고 엿장수 아저씨들이 입금시키지 못한 돈도 눈감아 주셨다.

▲ 나의 초등학교 졸업식 가족사진 © 나관호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 주어라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잘 나누어 주는 분이셨다. 입고 있던 양복도 필요하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주셨다. 지갑에 돈을 넣어서 다니는 것은 가난하고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우리 식구는 고모부의 사업 실패로 큰고모, 작은고모 식구들과 먼 친척 아이들까지도 함께 살았다. 다른 식구들이 우리 집의 주인 같았다. 1~2년도 아니고 7~8년을 그렇게 살았다.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심어 놓은 씨앗들이 열매가 되어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또한, 아버지는 내 물건도 팔촌 주영이와 그 동생 상영이에게 후하게 주셨다. 내가 울고불고 야단을 떨었건만 결국 그 물건은 내 손에서 떠나야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내 머리맡에는 새 장난감과 새 옷, 그리고 과자가 가득했다. 아버지가 새로 사 오신 것이다. 나는 아까워 조심스럽게 사용했지만 결국 며칠 후에는 다른 아이들 손에 장난감이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진패'라는 뇌성마비 청년이 있었는데 밤마다 텔레비전을 보려고 우리 집에 왔다. 애국가가 나오기 전부터 우리 집에 와서 마지막 애국가가 나와야 그제야 엉덩이를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날은 밤이 되어 우리 식구들은 잠을 자고 진패는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버지 어머니는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묵묵히 이해해 주셨다. 나는 그런 진패가 싫어서 다투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나를 혼내셨다.

▲ 뒷줄 오른쪽이 나, 왼쪽은 6촌 주영이 © 나관호

그래서 어느 날은 집을 나갔다. 집에서는 나를 찾느라 난리가 났고 나는 열어 놓은 대문 뒤에 밤늦게까지 숨어 있었다.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눈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쉬고 기진맥진했을 때 나는 나타났다. 아버지는 울면서 회초리로 때리셨다. 그러다가 중간에 나를 부둥켜안고 우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 날 아침이면 내가 좋아하는 쇠고기뭇국과 아버지가 만든 주먹밥이 상에 올라오곤 했다. 쇠고기뭇국을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린다.

"아버지! 당신은 나의 숨결 속에 살아 있고, 눈물 속에 추억을 만드는 마술사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주는 삶의 교훈은 자식의 인생에 가장 큰 길라잡이가 된다. 아버지는 가장 큰 스승이기 때문이다. 발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좋은 스승과 좋은 벗을 많이 만나 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과 교훈, 그리고 모범이 가장 훌륭한 교훈이었다."

발포아의 말에 나도 동감한다. 아버지의 교훈은 영혼에 각인되는 지워지지 않는 교훈이기 때문이다.

 

나관호 교수목사 (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치매가족 멘토 / 칼럼니스트 / 문화평론가 / 긍정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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