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극한직업과 부유함 그리고 ‘극한 영성’
[나관호목사 칼럼] 극한직업과 부유함 그리고 ‘극한 영성’
  • 나관호
  • 승인 2019.02.24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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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 목사의 행복발전소 54 ]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28:6) /
목사에게 힘든 생활이 다가와도 ‘극한직업’이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
결국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흥행 최고를 위해 달려가는 영화 ‘극한직업’은 어느 장르로 분류해야할까요? 코미디물? 액션물? 흥행의 요인은 중 하나는 한편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심리도 작용했습니다. 분명 코미디물인데 엑션씬은 진지하고 실제적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장르는 '폭력 조폭 경찰 코미디'입니다. 이 장르는 사실 기본 재미와 기본 관객은 마케팅이나 상영관 확보로 어느 정도 보장이 되는 장르입니다.

문화평론가 입장에서 분석해 보면 액션영화로서의 재미와 코미디로서의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던져진 작품으로 보여집니다. 많이 웃기고 오락성도 높습니다. 애초에 깊이 있는 명작이나 메시지를 기대하지 않고 ‘즐기러 간다’는 생각으로 본다면 모든 세대가 대체적으로 재미있게 보고 나올만한 내용입니다.

'극한직업'은 21세기 초에 한 때 범람하다시피 했던 코믹폭력물이 다시 등장한 셈입니다. 조폭보다는 경찰의 관점에서 영화를 끌어가고 있고, 한 명의 배우가 아닌 여럿에게 역할을 분담시켜서 웃음코드를 나누고 있습니다. 폭력은 거세고 유머는 많고 내용은 전형적인 권선징악입니다. 폭력물이지만 비극적이지 않고, 아주 기발한 유머는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가벼운 유머가 영화 내내 등장합니다. 다소의 유치함을 감수하면서 말장난 같은 부분이 나오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머와 예기치 않은 엉뚱함과 황당함을 계속 던져주고 있습니다. 강력한 한 방 보다는 계속 이어지는 가벼운 재미가 많은 영화입니다.

형사들의 어려움 전하는 영화 '극한직업'
형사들의 어려움 전하는 영화 '극한직업'

그런데 이 영화 제목에 줄거리를 투영시켜 한 줄로 표현한다면 “형사는 극한직업이다”라는 말로 함축됩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화제 대화도 “내 직업도 극한직업인데.”라며 자기자리에 대한 어려움을 토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더 극한직업이 많습니다. 톱뉴스를 장식했던 스크린도어에 끼어 사망한 정비업체 직원, 화력 발전소에서 석탄이 이송되는 벨트에 끼면서 협착돼 사망한 20대 비정규직 노동자, 제철 공장에서 작업 도중 사망한 50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면서 극한직업의 현실을 봅니다. ‘극한직업’, ‘격한직업’입니다.

목사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목사도 극한직업인데”, “개척교회 시절은 극한목회였어” 그렇게 말하는 부분이 이해가 갑니다.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참 어려움 일입니다. 극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목사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심방과 새벽예배, 철야예배 등을 인도하고 기도와 만남, 학문과 자기성장을 위한 노력 속에서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대형교회, 규모 있는 교회를 바라보니 안정적이고 부유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목사들이 심지어 생활고를 겪으며 대리운전, 자동차 세일즈, 페인트칠 노동을 하며 가족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반면, 대형교회 부목사로 안정적이며 부유하게 살면서도 ‘극한 직업’이라며 표현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그들은 영화를 대비해 ‘극한 목회’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두 부류 모두 내 주변에서 보고 있는 목사들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며 잠자기 전 잠시 축복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 예수님과 사도바울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도 머리 둘 곳이 없다하시며 가난하게 사셨고, 사람들을 통해 위협도 받고 고난을 받으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사도바울도 옥중 생활도 하고 40대 채찍 중 한대 감한 39대의 채찍을 여러 번 맞기도 했습니다. 극항 상황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극한 상황의 대가는 부활의 영광이요 천국에서 예수님 품에 안기는 영광이었습니다. 일종의 ‘극한 영성’의 결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어진 생각은 “목사는 직업이 아니다”라는 사명감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사의 길이 생업도구라면 목사를 하지 말고 장사를 하면 되지요. 목사는 소명의 길입니다. 가고 싶다고 가고, 가고 싶지 않다고 가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길이 아닙니다. 목사에게 힘든 생활이 다가와도 ‘극한직업’이라는 말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목사는 작업이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극한 목회’라는 말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상황의 표현을 위해 ‘극한’을 대입할 수는 있지만. 영적인면애서 보면 ‘극한’은 일종의 축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과 사도바울의 마음도 이해하게 됩니다. 마음도 가난해야 천국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유한 것만을 축복으로 해석하는 것은 기복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목사도 극한 직업입니다”라는 칼럼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나서보니 잘못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성경 속에서 ‘극한’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구절을 찾아보았습니다. 한 구절이 있었습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그들과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이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베드로전서 4:3-4)

‘극한 방탕’이라며 크리스천들이 이방인들처럼 방탕이 한계까지 가는 ‘극한 방탕’으로 달음질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는 구절이었습니다. 성경속에서 고난, 고통이 들어간 구절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극한 영성’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권력과 부유함, 물질의 풍성함은 오히려 타락과 실패의 길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종교가 정치와 결탁되면서 되면서 타락했고, 교회와 사제들이 부자가 되면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울 때 오히려 순수한 신앙을 유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광야의 길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극한 영성’입니다. 그것이 구도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귀함을 부유함에 대한 허무함으로 말하고 있으며, 가난과 성실의 유익에 대해 교훈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시편 49:6-8)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28:6)

목사들 중에 몸이 아픈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것은 스트레스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정신적인 극한 상황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더구나 목사들이 아프다고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목사도 육체의 한계를 넘어 무리하면 아플 수 있습니다.

극한직업, 격한 일을 하며 힘든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사회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극한직업’은 해석하기 나름입니다. 영화에서 말하는 ‘극한직업’은 몸을 혹사하는 직업을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새벽 일찍부터 나가 청소하는 아주머니들과 청소부원들 그리고 버스기사와 지하철 기관사들 또한 몸으로 일하는 발전소, 제철소, 건설현장 등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을 포함한 산업 일군들 모두 박수 받아야 할 분들입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극한상황을 가지게 되는 화이트칼라들도 있습니다. 그들 또한 박수 받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박수를 보내야 합니다.


나관호 목사 ( 뉴스제이 대표, 발행인 / 치매가족 멘토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칼럼니스트 / 문화평론가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강의교수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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