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예수님 인성 닮아 사는 것이 ‘인간됨’
[나관호목사 칼럼] 예수님 인성 닮아 사는 것이 ‘인간됨’
  • 나관호 목사
  • 승인 2022.08.0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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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 목사의 행복발전소 177]

예수님,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

【뉴스제이】 예수님의 인성적 삶을 닮아 사는 것이 ‘거룩한 인간됨’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적 사역인 병든 자 고치고, 죽은 자 살리고, 오병이어 기적으로 먹이신 것만을 바라보고 강조하면, 반쪽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고 본 받아야 십자가 죽음과 구속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성적 고난을 받으시고 고통을 그대로 당하시며,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사 여자의 후손(창세기 3:15; 갈라디아서 4:4)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아버지를 통해 태어난 우리들과는 다르게,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죄성과는 관계가 없으셔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서의 자격을 가지게 되신 것은 신성영역입니다. 

제자들과 모인 군중들에게 산상수훈 팔복에 대해 나누시는 예수님 (사진은 영화 장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셨던 예수님께서 우셨던 장면이 나옵니다. (눅 19:41, 요 11:35). 집을 방문하기도 하면서 친밀하게 지냈던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3남매. 그 중 오빠인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피 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시더라” (요 11:35). 예수님의 인성입니다.

그런데 회당장 딸의 죽음 앞에서는 다른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사람들은 슬피 울었지만 주님은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막 5:39)고 하시며, 예수님은 죽은 자를 앞에 두고 울고 있는 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막 5:39)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두고 왜 슬피 우느냐고 하셨던 주님께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요? 사람들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잠들었다고 하셨고, 잠자는 나사로를 깨우러 오셨습니다.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 (요한복음 11:11)

마르다와 거기 있던 유대인들에게 동일하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냐?"고 물으시지 않고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심을 말씀하셨기에 어떻게 보면 전혀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때를 놓쳐 죽음의 자리에 온 예수님을 본 마리아가 예수님이 여기 안 계셔서 오빠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마리아가 예수님 계신 곳에 와서 그분을 보고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분께 이르되, 주여,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으리이다 하더라” (요한복음 11:32).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요 11:4)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기 전에 오셔서 고쳐 준다는 의미로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나사로가 죽은 뒤에 뒤늦게 오신 예수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더 슬프게 울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한복음 11:32-33)

율법사들과 군중에게 고소 당하시는 예수님 (사진은 영화 장면)

생명이신 분을 앞에 두고 죽은 자로 인해 마리아와 마르다가 유대인들과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다는 것만을 보고, 예수님의 울음을 사람들의 무지와 불신 때문이라고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수님의 신성에 기인한 울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신성과 인성 모두의 슬픔이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회당장 딸의 죽음이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사로는 교제를 나누던 친밀한 친구였고, 회당장 딸은 ‘알게 된’ 사람입니다. 친구가 죽었는데 우는 것은 당연하고, 친구의 가족들을 보면서 위로의 눈물을 보이는 것은 예의(?)입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죽음 앞에 본능적으로 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사”(요 11:33)라는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시고 같이 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사랑이 많으시고, 감정도 풍부하시고, 슬픔의 자리에서는 우시고, 기쁨의 자리에서는 웃으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우리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됨’이 어떤 점에서 우리와 같은지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성경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히 2:17)고 말씀하고 있으며,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요한일서 4:2)

육체는 성장합니다. 갓난아이로 태어나신 예수님도 장성한 사람으로 성장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키가 자라고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눅 2:40, 52)하셨고, 12살 때는 율법사들과 토론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요소인 ‘마음’(soul)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적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려는 혼란스러움 가운데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은 마음에 번민하시며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한복음 12:27)

그리고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함께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할 제자들은 졸고 있고, 죽음의 시간이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마 26:38)고 제자들에게 호소하시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와 한결같은 예수님이 가지셨던 ‘인간의 연약성’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피곤해 길에 주저앉으셨고(요 4:6), 배 안에서 잠드셨으며(마 8:24), 목마르셨고(요 4:6), 금식 기도 후에 배고프셨으며(마 4:2), 연약한 인간으로서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으며 그 결과 천사들의 도움을 얻기도 하셨습니다.(눅 22:43)

또한,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히 4:15).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몸이 약하다든지 시험을 받는 것이 결코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이나 죄 때문에 몸이 약해지거나 시험을 받게 되었다면 회개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똑같은 영혼을 가지셨고, 속죄 제물로 희생되어야 했기에 죽을 수 있는 몸, 즉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세 가지 요소인 몸과 영과 혼을 가지고 태어나심으로 예수님은 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고 본 받아야, 십자가 죽음과 구속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세 가지 요소인 몸과 영과 혼을 가지고 태어나심으로 예수님은 참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고 바라보고 본 받아야, 십자가 죽음과 구속의 뜻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진은 영화 한장면)

나는 목사이며 교수입니다. 그래서 ‘목사다운 목사인지’, 자주 나를 점검하곤 합니다. 인격이 목사다워야 하니까요. 사실 목사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들 중 ‘물음표’가 생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몇년 전, 뉴욕에서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칼럼으로 쓴 것을 보내주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제목이 “목사님 or 목사놈?”입니다. 뉴욕의 어느 목사들이 카페에서 멱살 잡고 욕하며 싸움하는 모습을 본 어느 사람이 “목사놈들이...”이라는 말을 듣고 칼럼을 쓴 것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목사는 거룩한 짐을 지고 가는 거룩한 직책입니다. 목사부터 먼저 예수님의 인성을 닮은 인간이 된 후, 회개하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모두 인간미가 있고, 사랑 가득하며 예수님의 인성적 삶을 닮아 살려고 투쟁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군사에 속한 리더들이 먼저, ‘인간이 된 후’ 자기 자리에서 맡은 바를 행하면 좋을 것입니다. 임마누엘!!!


나관호 목사 ( 뉴스제이 발행인 / 치매가족 멘토 / 칼럼니스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제자선교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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