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켜쥐면 죽어!
움켜쥐면 죽어!
  • 심창근
  • 승인 2018.09.12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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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칼럼] 심창근 목사의 ‘영혼의 향기’

“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놓아야 산다구. 움켜쥐면 죽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고향 마을은 양쪽에 산들이 높이 솟아있고 그 사이사이 골짜기로 시냇물이 흐르고, 그 시냇가 주변에 초가집이 몇 동씩 옹기종기 모여 촌락을 이루고 있다.

우리 집은 마을 맨 위쪽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황토에 짚을 잘게 썰어 넣어 벽을 쌓고 짚으로 지붕을 이은 초가삼간이었다.

대문이 없어 누구나 들어와서 쉴 수 있었고, 산에 굴러다니는 흔한 돌로 쌓은 돌담과 마당 한편의 감나무, 밤나무, 호두나무, 대추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 수백 마리 다람쥐들의 좋은 놀이터였고 그들만의 천국이었다.

 

눈이 많이 오는 겨울날 아침, 손을 호호 불며 물을 끓이려 부엌에 들어가면 먹을 것을 찾아 새끼들을 데리고 내려온 엄마 토끼, 아빠 토끼 한 가족이 아궁이 앞에 앉아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철모르는 우리가 이게 웬 횡재냐? 좋아하며 토끼를 잡으려 하면 어른들은 살려고 집에 들어온 짐승을 해쳐서는 안된다고 꾸중했다.

우리는 아깝지만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어 산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던 어른들의 가르침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생생하다.

그런데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작은 것 때문에 잃고 마는 안타까운 장면을 고향 마을에서 목격한 일이 있다.

8살이던 그해 여름, 수십 년 만에 큰 장마가 닥쳤다. 날마다 소낙비가 쉴 새 없이 쏟아져 골짜기마다 물이 넘치고 있었다.

냇물이 점점 불더니 결국 작은 둑을 넘어 마을로 쏟아져 들어왔고 마침내 집안 댓돌까지 들이닥쳤다. 온 마을이 물바다였다.

그때는 막 보릿고개를 넘느라고 풀죽을 쑤어 먹으며 겨우 연명하던 때라 다들 굶주림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물난리까지 나서 온 동네를 쑥밭으로 만들어놓으니 사람들은 하늘을 원망하면서 흙탕물로 범벅이 되어 흘러가는 세찬 물살을 망연하게 보고만 있었다.

그때 갑자기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온 마을 사람들이 소리 나는 곳으로 몰려갔다.

한 여인이 광포한 흙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우리 이웃집 과수댁이었다.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형제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사는 분이었는데 키우던 돼지, 닭 그리고 수확하여 말리려고 묶어놓았던 보릿단 둥치가 떠내려가자 보릿단 둥치라도 건져보려고 쇠고랑으로 찍어 끌어당겼지만 물살이 너무 강해서 떠내려가는 보릿단을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쇠스랑을 놓지 않아 보릿단과 함께 점점 깊은 물속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소리 소리쳤다. “온양댁 아주머니! 보릿단을 버리세요! 쇠스랑을 놓으세요. 그대로 가면 죽어요!”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소리를 삼켜버리는 세찬 물소리와 먹을 것을 놓치면 안된다는 그녀의 절실한 몸부림이 그 여인으로 하여금 보릿단을 놓지 못하게 했고, 잠시 후 그녀는 보릿단과 함께 흙탕물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뒤 장마가 그치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물막이 보에서 죽어있는 과수댁을 발견하였다. 마을 어른들은 조촐하게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 후 한동안 동네 사람들은 그녀가 살던 집을 지나갈 때면 그깟 보리 한 단이 뭐라구 죽어!”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놓아야 산다구. 움켜쥐면 죽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우리 아이들의 가슴에도 깊이 새겨졌다.

그 후 나는 내 욕심 때문에 무언가를 쥐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55년 전 그 여름, 보릿단과 함께 물속으로 사라지던 과수댁 아주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다.

주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나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자기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심창근 목사 (강남 안디옥교회 / 네팔 신학교 건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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