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감성 지성 영성 ... 그 중의 제일은 영성이라
[영성칼럼] 감성 지성 영성 ... 그 중의 제일은 영성이라
  • 김봉준 목사
  • 승인 2022.07.07 0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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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교수, “지성에서 영성으로” 주장/
‘감성’, 정이고 사랑이다./
‘지성’, 상식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과학/
‘영성’, 보이지 않는 실제의 세계/

【뉴스제이】 새로이 취임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의 타파를 언급했다. 전임자의 감성팔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표현인 듯하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 이어령 교수는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주장했다. 감성과 지성과 영성이 모두 나왔다.

‘감성’은 정이고 사랑이다. 따뜻한 사회를 위해 감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단, 잘못된 감성은 문제를 일으킨다. 내 편, 내 가족만 챙기기에 이념과 진영에 따라 편가르기가 발생할 수 있다. 5년의 대통령 임기 동안 잘못된 감성팔이는 공정과 정의를 허공에 날렸고, 적폐란 올가미로 목불인견의 모습을 수많은 사람이 보았다.

‘지성’은 상식을 중시하는 인문학적 과학이다. 거기에 사용되는 도구는 법과 원칙이다. 당연히 “법대로” 상대를 털게되면 먼지가 천지에 날릴 수밖에 없다. 반지성주의는 감성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써 그 속에 숨겨진 의도를 안다면 가슴 섬뜩한 복수혈전이 상상된다.

‘영성’은 보이지 않는 실제의 세계이다. 평생토록 지성을 연마한 이어령은 사랑하는 딸의 아픔을 목도하며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다. 평생 최고 가치로 여기던 지성을 내려놓고 영성의 세계로 들어갔다. 심성의 한가운데 자리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감성과 지성을 무릎 꿇게 했다.

이스라엘이 가장 위대한 인물로 모시는 모세는 젊은 시절 동족 히브리인을 위해 살인을 했다. 감성이 이성보다 앞서 나갔던 것이다. 40년 후, 출애굽한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고나서 그는 지성주의자가 되어 율법을 준수했다. 광야에서 불평하던 감성주의자들은 여지없이 지성의 율법 앞에서 심판 받았다.

예수님은 어떠한가?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눅10장)의 감성을 높이 사셨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지성주의자는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려 했으나, 용서하신 예수님의 방법은 감성에 의한 해결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요8장). 감성의 긍정적 효과는 선함과 인자함으로 나타난다.

한편, 예수님 설교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의 8복 강해(마5장)는 지성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병자를 고치시는 모습에선 영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 중의 사도인 바울은 당대의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 율법대로 사는 것이 지고지선(至高至善)인 줄 알았던 그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의 인생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바뀌었다. 사도로서 바울의 감성은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했고, 그의 지성은 신약성경의 절반을 기록했으며, 그의 영성은 죽은 유두고를 살리기도 했다. 주님은 바울의 감성, 지성, 영성을 고스란히 고용하며 사용하셨던 것이다.

예수님 사역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오병이어(요6장)와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요11장)은 감성과 지성 그리고 영성이 모두 담겨있다. 광야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 것은 감성이요, 그들 모두를 배불리 먹이신 것은 영성이요, 남은 12광주리를 거두게 한 것은 지성이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린 것은 감성이요 무덤 앞의 돌을 치우게 하신 것은 지성,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영성’이다.

“감성 지성 영성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영성이라”

예수님은 감성, 지성, 영성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셨다. 모두가 인간사회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듯 감성, 지성, 영성도 항상 있어야 한다. 


김봉준 목사 (아홉길사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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