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 목사 칼럼] 100년 전 대한제국 황제 ‘고종 랩소디’
[나관호 목사 칼럼] 100년 전 대한제국 황제 ‘고종 랩소디’
  • 나관호
  • 승인 2019.01.05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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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나관호 목사의 행복발전소 43]
3.1운동 기폭제 고종 붕어(崩御)...장례일 3월 3일 이틀 전을 거사일로
고종은 “적민(積民)이 곧 국(國)이다”(백성이 쌓여야 나라다)라는 말을 했다
고종 촌수, 선대 왕인 철종과 ‘17촌’/
고종, 선교사들을 ‘선생님’이라 불러/

1919년이 되면서 ‘임시정부 설립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에 초점이 맞춰지며 각종 행사가 정부와 기관 단체 그리고 종교기관에서 기획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고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0년 전, 고종 랩소디(Rhapsodie)를 통해 100년 전 제한제국과 시대상항을 돌아보아야합니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붕어(崩御 : 황제의 죽음을 일컫는 말)했습니다. 고종의 죽음은 2·8 독립선언과 3·1 만세운동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3월 1일을 만세운동 거사일로 정한 것은 고종의 장례식 일정이 3월 3일로 정해진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고종 총독부에 의한 ‘독살설’까지 나돌아 다니는 상황에서 울분에 쌓인 백성들이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 날을 택한 것입니다. 실제 서울역 하차 인원이 평소에는 매일 평균 1,500~1,600명이던 것이 2월 26일 3,000여명, 27일 6,000여명으로 늘어났는데, 장례일 전날이 주일이어서 기독교인들을 배려하고 보니 3월 1일을 만세운동의 거사일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 후에도 고종의 죽음에 대한 울분은 여러 독립선언과 만세운동, 특히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비롯한 국내외 대한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대한문 앞에서 선포된 대한독립만세
대한문 앞에서 선포된 대한독립만세 (한국일보 제공)
종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종로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한국일보 제공)

상해 임시정부의 국호 ‘대한민국’(大韓民國)은 고종이 직접 지은 이름 ‘대한제국’(大韓帝國)과 그가 나라를 일컬어 자주 썼다는 단어 ‘민국’(民國)을 합해 만들었습니다. 고종은 나라를 지칭할 때 ‘국가’(國家) 대신 ‘민국’(民國)을 사용했습니다. 고종은 “적민(積民)이 곧 국(國)이다”(백성이 쌓여야 나라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왕조국가가 아닌 근대국가에서 나라의 주인은 왕가가 아닌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고종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무능한 군주’였거나, 격변의 시대를 만난 ‘비운의 군주’였을까요?망국의 시대였던 구한말은 국사 연구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 이끼 낀 역사 같습니다. 고종은 무능했던 것이 아니라, 격랑의 시대를 만나 ‘불운했던 군주’였지만, 근대 국가의 꿈을 꾸었던 미래형 군주였습니다.

고종은 촌수로만 보면 왕이 될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선대 왕인 철종과 자그마치 ‘17촌’이기 때문입니다. 1863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지명하였습니다. 고종은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만 빼고 보면 태생은 범상했습니다. 아명(兒名)은 ‘개똥이’. 저잣거리를 굴러다니는 가장 흔한 이름으로 불리던 아명을 사용했습니다.

‘개똥이’ 고종은 열두 살의 나이로 왕좌에 오르는 순간부터 ‘범상치 않은 생’을 살게 됩니다. 500년 왕조 역사상 유례없이 선대 왕이 아닌, ‘살아있는 아버지’를 상전에 두었던 군주 고종은 끊임없이 왕의 권력을 탐했던 아버지와 평생 갈등했습니다. 그리고 사방이 적들로 가득했고 어지러운 시대의 동반자였던 아내 명성황후를 적국의 칼에 처참하게 잃었던 울분 가득한 군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탓으로 후대의 기억 속 고종의 존재감은 항상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 ‘어디쯤’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을 ‘아버지와 아내의 그늘에서 우왕좌왕하다 나라를 잃은 무능한 군주’로 아직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경운궁 대안문(현 덕수궁 대한문)을 나서는 고종의 출어 장면. 만국기가 나부끼는 것으로 미루어 행사날로 추정 (한국일보 제공)

대한제국 말기 일제는 호위라는 명분으로 왕실 주변을 철저히 감시했고, 덕수궁 근처에는 항상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섰으며 출어 때는 특히 완전군장을 갖춘 일본군들이 황제를 포위하듯 둘러쌌습니다.

고종을 어리석은 군주로 둔갑시킨 주체는 바로 일본이었습니다. 역사학자 이태진 교수(서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는 과정에서 명분 없는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망국 책임론’, 즉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없는 야만의 나라였기 때문에 스스로 망한 것’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습니다.”

고종은 1897년,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습니다. 그후 큰 목표를 가지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실시한 광무개혁의 결과들이 한없이 축소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개혁은 1905년 러일전쟁을 이긴 일본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내면서 좌초됐고, 그나마의 성과들은 친일 인사들의 공으로 둔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고종은 나라를 망하게 한 유약한 왕’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 시작합니다. 조선의 식민지화가 ‘불법강점’이 되지 않으려면. 한반도는 ‘미개한 땅’이어야만 했고, 그 땅의 군주는 반드시 무능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실체는 달랐습니다. 당대 일본 학자 사이에서도 ‘새로운 문물을 살피는 데 있어서 만큼은 조선왕조 역대 어느 왕보다 뛰어났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고종은 수명을 다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그 위에 시민이 주인이 되는 근대국가를 세우려 했습니다.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의 본궁을 경복궁보다 도심에 위치한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고종은 1919년 붕어할 때까지 이 궁을 떠나지 않았다. 나라가 주권을 잃지 않고 바로 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힘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가 내정에 간섭해 오던 1880년대 중반, 고종은 청의 감시를 피해 근대화에 필요한 정보가 담긴 외국 서적들을 몰래 들여오기 시작합니다. 상하이에서 들여온 책들이 자그마치 3만 여권. 이때 부지런히 배우고 익힌 지식들은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빛을 발했습니다.

1903년 서울 시내를 달리던 전차
1903년 서울 시내를 달리던 전차 (한국일보 제공)

그리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모델로 삼은 도로체계를 만들고, 전차가 달리는 철길 옆으로 ‘탑골공원’을 만들도록 지시해 시민들이 언제든 자유롭게 모여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1898년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 위크는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12월에는 종로-청량리 간에 첫 전차 궤도를 완공했습니다. 1899년 서울 곳곳을 누비기 시작한 전차는 도쿄보다도 앞선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차의 정원은 40명으로 중앙의 칸막이 특실은 양반만 사용했고, 그 좌우를 일반 서민이 이용했습니다. 경복궁에만 들어왔던 전기가 서울 전역의 밤을 밝히게 된 것도 바로 이 무렵의 일입니다.

그저 ‘도읍’에 불과했던 한양이 근대국가의 ‘수도’로 거듭나는 데는 누구보다도 고종 황제가 개인 돈인 내탕금까지 선뜻 내놓을 정도로 열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늦었을지언정,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의미심장한 것 중 하나는 고종이 선교사들을 ‘선생님’이라 불렀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뿐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외교관, 심지어는 상인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반도 전체가 일본, 청나라, 러시아, 영국 등 열강의 각축장이 돼 버린 상황 속에서 고종은 나라의 생존을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오직 외교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외국어는 물론, 해외 문물에 능통한 젊은 외교관들을 양성하기 위한 ‘원어민 교사’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황제의 거처인 경운궁 바로 앞에 ‘정동 주한 외교공간’이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습니다.

정동에는 황제를 만나기 위해 모여든 많은 외국 사절과 해외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황제의 눈에 든 외국인 엘리트들은 예비 외교관들 양성하고 가르치는 ‘진짜 선생님’이 됐습니다. 고종에게 서양문물을 직접 배워올 수 있는 ‘외국어 능력’은 곧 근대화와 자주독립의 원천이었던 것입니다. 헤이그에 파견됐던 3인의 특사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 모두 5개 국어에 능통한 외국어 능력자들이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종이 먼저 나서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국외중립 선언을 발표했지만 철저히 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1907년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로 파견한 헤이그 특사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방해와 서구 열강들의 방관으로 회의장에 들어서지도 못했던 특사들은 황제의 친서를 품고 그대로 돌아서야만 했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 원본에는 조약 체결에 필수적인 고종황제의 수결과 국새(임금의 도장)가 없고 일본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혀있습니다.

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 원본에는 조약 체결에 필수적인 고종황제의 수결과 국새(임금의 도장)가 없고 일본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혀있다. (한국일보 제공)
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조약 원본에는 조약 체결에 필수적인 고종황제의 수결과 국새(임금의 도장)가 없고 일본 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혀있다. (한국일보 제공)

단식까지 불사하며 퇴위를 거부했던 고종은 1907년 ‘강제 퇴위’ 당합니다.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은 궁궐의 내시 2명을 데려와 각각 고종과 순종의 자리에 세우고 ‘강제 양위식’을 거행했습니다. 마지막 군주인 순종이 즉위하고 채 3년이 지나지 않아, 대한제국은 일본과 병합됩니다. 주권을 빼앗기고, 왕위를 빼앗기고,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도했던 고종은 죽는 순간까지 ‘자주와 독립’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100년 전, 1919년 1월 21일, 한일병합 9년 만에 고종 황제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명백한 독살 정황을 전해들은 국민들은 태극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황제가 만든 탑골공원에서, 황제의 궁궐이었던 경운궁 대안문 앞에서, 그들은 식민지 백성이 아닌 이미 망해버린 ‘대한제국의 국민’으로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는 만세를 외쳤습니다. 그것이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에 벌어진 3.1 만세운동입니다.

 


나관호 목사 ( '뉴스제이' 대표, 발행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치매가족 멘토 / 칼럼니스트 / 문화평론가 /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강의교수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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