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응답하라 1884’ 조선말기 '최초 크리스마스'
[나관호목사 칼럼] ‘응답하라 1884’ 조선말기 '최초 크리스마스'
  • 나관호
  • 승인 2018.12.24 2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관호 목사의 행복발전소 42]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14)/
알렌 선교사, 1884년 12월 26일 일기에/
우리나라 최초의 크리스마스 기록/
언더우드 선교사, 1886년 크리스마스에/
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는 기록/

【뉴스제이】 "메리 크리스마스! Merry Christmas!"

우리나라에서 가졌던 '최초의 크리스마스', 조선말기의 성탄절은 누가 맞았으며, 어떻게 지냈을까요? 1884년 9월 내한한 미국인 의사 알렌(Horace Newton Allen) 선교사. 그가 도착한 해인 1884년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12월 26일 알렌의 일기에 등장합니다. 그것이 조선의 첫 번째 성탄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록에 나타난 우리나라에서 드려진 최초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어제는 성탄절이었다. 파니(Fannie)는 나에게 성탄 선물로 멋진 수놓은 공단 모자와 비단 케이스에 넣은 공단 넥타이 두 개를 주었다. 모두 그녀 손수 만들어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일본 요코하마에 멋진 실크 실내복 한 벌을 15달러에 샀지만 많은 외국 우편물들과 함께 선물할 것들을 이번 정변(갑신정변)이 발생했을 때 잃어버렸다. 우리는 민영익을 잘 치료해준 대가로 이번 주에 조선 국왕으로부터 멋진 선물을 받았다." (『Allen's Diary』, Dec. 26, 1884)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로 활동을 했다.    ⓒ 뉴스제이 

알렌은 아내에게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과 자신이 가족을 위해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지만 잃어버린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마침, 조선 국왕 고종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알렌이 맞은 성탄절은 자신의 가족 차원에서 선물을 나누는 것으로 기념되었지만, 고종의 선물이야기는 고종이 인정한 크리스마스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천주교도들을 탄압하고 죽인 ‘병인박해’. 프랑스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대원군의 의도가 실패하면서 발생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였습니다. 그랬던 조선이 20여 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크리스마스’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중심에는 1884년 12월 4일에 일어난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여 1874년경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개화당’이 청국의‘ 속방화(屬邦化) 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의 완전 자주독립과 자주 근대화를 추구하여 일으킨 것이 ‘갑신정변’입니다.

급진개화파의 칼에 민영익은 중상을 입고 쓰러집니다. 14명이나 동원된 한의사들의 노력에도 상처부위의 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미국인 의사 알렌이 민영익을 외과 수술로 살려냅니다. 그 결과로 기독교에 대한 고종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갑신정변’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홍영식의 집을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이름의 서양식 병원으로 개원합니다. 그러나 12일 지난 3월 12일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취소되고 ‘중생을 구한다’는 의미의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병원 ‘제중원’의 의사로 활동을 합니다.

또 다른 크리스마스 기록은 조선의 입국 허가서를 받고 정식 선교사로 1885년 4월 조선에 들어온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에게 나타납니다. 언더우드가 그 다음해인 1886년에 크리스마스에 지인들에게 식사를 대접했다는 기록이 그의 부인 일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의 저녁 식사를 대접한 것은 1886년 크리스마스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후 그는 한국에 있는 동안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는 반드시 우리 집에서 하고, 항상 모든 사람에게 해마다 참석해달라고 했다." (『Underwood of Korea』, 1918, 64-65쪽)

조선말기 선교사들

언더우드가 맞았던 크리스마스는 자신의 집에 외국인들을 초대하여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언더우드는 저녁을 대접하는 것으로 기쁨을 전했던 것입니다. 또한, 한국인 신자들도 참여한 성탄절 기념예배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감리교 선교사로 파송되어 평양지역에서 사역하던 노블(M. W. Noble) 선교사 부인이 1896년 그 지역 감리교 신자들과 함께 했던 성탄절 이야기를 일기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탄과 새해가 다가왔다가 지나갔다. 나는 성탄 전날 밤에 부인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는데 부인 30여명이 그들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우리는 기도하고 노래하고 성탄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과자와 사탕, 밤으로 그들을 대접했다. 성탄절 아침 우리는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다. 한국인들은 밑둥치까지 그대로 둔 장식하지 않은 나무를 하나 마련했는데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두 방이 사람들로 가득 차 바닥에 앉기도 하고 뒤에서는 서기도 하여 할 수 있는 한 앞으로 오려고 했다. 우리 작은 예배당에 약 200명 가량이 왔다. 아더(Rev. W. Arthur Noble)씨가 성탄절 설교를 한 후, 김창식씨 부인이 이야기하고 나서 재빨리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그 때까지는 상당히 질서를 지켰다. 그들은 그날 아침 상당히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아더씨의 한국어 구사도 상당히 자유로운 것 같았다." (『The Journals』, Jan. 2, 1897.)

​지자체 잡지에 실린, ‘응답하라 1884’ 조선말기 '최초 크리스마스' 기사
내가 쓴 칼럼, ‘응답하라 1884’ 조선말기 '최초 크리스마스' 기사가 지자체의 잡지에 실렸다. Ⓒ뉴스제이

성탄절에 부인들을 초청해 집에서 식사를 하고, 교회에 모여 성탄축하 예배를 드리고 선물을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가졌던 최초의 크리스마스. 조선말기의 성탄절은 서로 선물을 나누며, 식사를 나누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크리스마스 모습의 모태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크리스마스는 동일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 뉴스제이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누가복음 2:14)


나관호 교수목사 (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말씀치유회복사역원 대표 / 치매가족 멘토 / 칼럼니스트 / 문화평론가 / 긍정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강의교수 /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