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서커스’에서 문화 창조능력 배우다
‘태양의 서커스’에서 문화 창조능력 배우다
  • 나관호
  • 승인 2018.12.03 10: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관호 목사의 행복발전소 34]

'태양의 서커스'와 '동춘 서커스'의 차이점은 실력아닌 창조성
볼거리에 시대에 맞는 음악,미술, 무용, 연극, 미디어, 첨단과학과 융합해 ‘창의력’이 만들어낸 문화융합 작품

‘태양의 서커스’의 한 레퍼토리인 '쿠자' 한국 공연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낡고 오래된 소재로 여겨지던 서커스를 살려내 세계적인 대형 공연으로 만든 게 바로 이 ‘태양의 서커스’입니다. 기도원에서 내년을 기획하고 계신 형님 목사님을 찾아뵈었을 때 대화를 나누다가 ‘태양의 서커스’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따님이 가족들에게 ‘태양의 서커스’ 티켓을 선물해 공연을 보신 후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태양의 서커스’와 우리나라에서 서커스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동춘 서커스’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소멸할 것만 같던 서커스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태양의 서커스’의 힘은 어디서 온 걸까요?

‘태양의 서커스’의 '쿠자'는 주인공이 미지의 존재를 따라 여행을 하며 겪는 신비로운 이야기의 형식을 빌어, 거대한 규모의 뮤지컬을 보게 합니다. 11년 전 초연한 뒤 전 세계에서 8백만 명이 관람했습니다. ‘태양의 서커스’ 관람권은 7만 원에서 최고 26만 원에 이르지만, 우리나라에서 선 예매로 100억 원 이상이 팔렸다고 합니다.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의 시작은 캐나다의 거리 공연자 ‘기 랄리베르테’가 거리의 예술가 20명의 단원과 함께 1984년에 캐나다 퀘벡 주에서 설립한 엔터테인먼트 회사입니다. 동물 없는 서커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쇼를 내세워 지금은 직원 4천 명을 거느린 대형 공연기업이 됐습니다. 캐나다의 자랑이자, 세계인이 모두 한 번쯤은 꼭 보고 싶어하는 인생 공연으로 꼽히는 ‘태양의 서커스’는 첨단과학과 함께 만든 공연이며, 종합예술의 극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태양의 서커스’가 세계적인 공연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서커스를 넘어 묘기를 이야기로 엮어내는 방식,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 여기에 자본이 결합해 탄생된 종합예술입니다. 서커스의 볼거리에 시대에 맞는 음악과 미술, 무용과 연극, 미디어와 첨단과학 등 다른 장르와 융합해 ‘창의력’(Creativity)이 만들어낸 이 시대 최고의 문화융합 작품이 된 것입니다.

'태양의 서커스'와 '동춘 서커스'(우측)
'태양의 서커스'와 '동춘 서커스'(우측)

1년 매출액이 1조원이 넘습니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대기업입니다. 전 세계 순회공연으로 지금까지 누적관람객은 1억명이 넘고, 지난해 전 세계에서 올린 매출액이 10억달러(1조1000억원)입니다. 서커스만으로 1조원 대 매출을 만들어낸 비결은 바로 ‘창조성’(Creativity)입니다. 길거리 서커스를 음악과 춤, 패션과 조명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로 발전시켜 거대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키운 것입니다.

전 세계에서 단원을 뽑을 때 선발 기준은 서커스 실력도 중요하지만 ‘두뇌와 마음의 창의력’을 우선한다고 합니다. 중요한 부분입니다. ‘태양의 서커스’는 단순하게 기술적인 것 말고도, 예술적인 것과 음악적인 것까지 다 결합시켜 보여주는 종합예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줄타기 곡예사를 뽑을 때 "줄을 타고 올라가 크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요구하기도 하는데, 가창력을 테스트하는 게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 어떤 연출을 하는지 창조력과 끼를 보기 위해라고 합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개성을 가진 창의적인 인재. 그들을 모아 공연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혁신적인 무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를 섞어 다국적이고 창조적인 쇼를 만듭니다. 여러 나라의 문화 코드를 맞춘 덕분에 국제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최고 공연단의 명성에 걸맞게 연봉도 업계 최고 수준입니다. 수익은 반드시 직원에게 배분하는 원칙을 지키고 있으며, 덕분에 조직 충성도가 높아 직원 평균 근속 연수가 15년에 달하는데, 최고 대우를 해주는 만큼 좋은 쇼가 나오는 것입니다.

세계무대에 ‘태양의 서커스’가 있다면 우리에겐 ‘동춘 서커스’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춘 박동수 씨가 단원 30여 명을 모아 시작한 ‘동춘 서커스’는 전국을 돌며 아찔한 묘기를 선보였던 가난했던 시절 거의 유일한 볼거리였습니다. 60∼70년대에는 단원이 300명 정도에 이르고 절정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TV와 영화 산업이 성장하면서 독보적이던 '즐길 거리'의 자리를 내줬습니다. 우리가 재미로 말하던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코푸가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말도 ‘동춘 서커스’에서 나왔고, ‘동춘 서커스’에서 활약하던 남철과 남성남 콤비, 서영춘 씨와 같은 스타들도 방송으로, 영화로 떠나면서 서커스는 급격히 쇠락했습니다. 94년 역사의 ‘동춘 서커스’ 단원은 현재 40여 명인데 대부분 중국인이라고 합니다.

‘동춘 서커스’와 ‘태양의 서커스’의 두 공연의 ‘원천 기술’은 닮아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 곡예 종류와 기술은 어느 서커스단이나 비슷합니다. 줄타기와 공중 묘기, 몸 비틀기와 의자 탑 위에서의 곡예 등이 공연의 큰 줄기를 이룹니다. 밧줄 위 자전거, 바퀴 위 줄넘기 등의 묘기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두 서커스단의 매출 규모 역시 격차가 큽니다. ‘태양의 서커스’는 1984년 창단 이래 전 세계 450여 개 도시에서 1억90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고, 평균 연 매출은 8억5000만 달러(약 9600억원)에 달합니다. 반면에 1925년 창단한 동춘서커스의 연 매출은 9억9000만원(2017년 기준)에 불과합니다. 무려 1000배의 차이입니다. ‘1조원’ 대 ‘10억’의 차이는 대단한 것입니다. 대기업과 동네 맛집 정도의 차이입니다.

‘태양의 서커스’와 ‘동춘 서커스’의 직접 비교는 힘들지만,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헤아리는 한국 서커스인 ‘태양의 서커스’를 대입해 관찰해 보니 답이 보입니다. 실력으로만 보면 ‘동춘 서커스’ 단원들의 기술이 절대로 ‘태양의 서커스’ 단원들의 기술이 뒤지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문화라는 형식의 옷’의 차이입니다.

‘태양의 서커스’는 서커스 기술을 넘어 ‘묘기를 이야기로 엮어내는 방식’, ‘다양한 레퍼토리 개발’, 서커스의 볼거리에 ‘시대에 맞는 음악과 미술, 무용과 연극, 미디어와 첨단과학’ 등 다른 장르와 융합해 ‘창의력’(Creativity)이 만들어낸 최고의 문화융합 작품입니다. 물론 자본의 융합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동춘 서커스’는 훌륭한 기술을 가졌음에도 ‘태양의 서커스’에 비해 창의력과 자본력이 떨어지다 보니 새로운 레퍼토리 개발이나 음악과 미술, 첨단과학의 융합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거의 변화 없이 그 방식, 그 레퍼토리, 그 기술의 전수, 그 대로의 홍보, 그 대로의 문화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동춘 서커스’에 응원과 희망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런 상황 앞에서 ‘복음과 한국교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천당 불신지옥’만을 외치는 선교에서 더 ‘복음적인 시대문화’의 옷을 입히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친 최권능 목사님의 외침은 시대언어였습니다. 당시 복음은 상류층인 양반보다 하류층에게 더 통용되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가장 쉽고, 강렬하게 전하려는 의도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나온 것입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당시의 ‘싱크탱크’였습니다.

한국교회에도 ‘싱크탱크 기관’과 목회자가 나타나야 합니다. ‘복음적인 문화’가 입혀져 시대언어로 포장된 ‘십자가복음’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의 삶에서 그것을 배우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은 기득권적 율법의 테두리에 살며 마음에 안드는 사람은 율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배제하는 외골수 같은 사람들입니다. 헬라인은 로마의 식민지하에서 로마 시민이 되고 세속적 출세 성공을 추구하는 세속적 성공의 욕망이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이 유대인과 로마인 사이에서 사도바울은 이들과 소통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고리도전서 9:20-21)

유대인을 대할 때는 그들과 소통을 위해 바울은 율법아래 있는 사람이 아닌 율법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율법아래 있는 사람처럼 소통했고, 율법을 모르는 헬라인을 대할 때는 바울은 그리스도의 율법아래 있는 자이지만 그들과 소통하기 위해 율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고린도전서 9:19)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이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두 대륙의 두 세계관을 소통시킬 수 있는 새로운 문화적 소통의 옷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부활의 지혜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소통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복음을 시대의 문화 옷과 창의력으로 융합시켜 더 적극적으로 전할 수 있는 하늘의 아이디어를 찾아야합니다.

 

나관호 목사 (  '뉴스제이' 대표, 발행인 / 치매가족 멘토 / 칼럼니스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강의교수 /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세계선교연대총회 경기북부 노회장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