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 바울, 김창식” 감동 눈물 ... 머슴 출신 ‘한국인 최초 감리교 목사’ 김창식의 삶을 다룬 뮤지컬 다큐
“머슴 바울, 김창식” 감동 눈물 ... 머슴 출신 ‘한국인 최초 감리교 목사’ 김창식의 삶을 다룬 뮤지컬 다큐
  • 나관호 발행인
  • 승인 2021.12.29 12: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개신교 최초 목사 탄생 120주년/
고난의 팬데믹 상황에서 위로와 희망 메시지 전해/
전쟁 부상자들과 전염병 환자 돌보는 일에 헌신/

【뉴스제이】 성탄절에 KBS 1TV에서 방송된 성탄특집 뮤지컬 다큐멘터리 ‘머슴 바울, 김창식’이 안방에 감동 눈물을 쏟게 하면서, 김창식 목사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머슴 바울, 김창식’은 ‘한국 개신교 최초 목사 탄생 120주년’을 맞아, 그 첫 길을 걸어간 실존 인물 김창식과 제임스 홀 선교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사랑과 희생, 헌신의 주제를 아름다운 선율 속에 담아내며 새로운 형식으로 기획됐다.

KBS는 그동안 ‘죽음보다 강한 사랑, 손양원’ ‘일사각오 주기철’, ‘걸레 성자 손정도’ 등 굵직한 성탄특집 역사인물 다큐멘터리를 선보여왔다. 하지만 뮤지컬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은 KBS로서도 최초다.

‘머슴 바울, 김창식’는 의심에서 믿음으로, 가진 자의 머슴에서 신의 머슴으로, 그리고 아버지에서 아들로, 마침내 1901년 한국 개신교 최초의 목사가 되어 ‘조선의 바울’이라 불렸던 머슴출신 목사 이야기가 2대에 걸친 감동적인 인연과 우정, 사랑과 헌신의 뮤지컬 드라마다. 그리고 청일전쟁으로 전염병이 창궐했던 1894년 평양에서 김창식과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가 보여줬던 희생과 헌신의 드라마다.

연출자 권혁만 감독은 코로나19가 일상을 멈추게 해도 삶까지 멈출 수는 없기에, 120여 년 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들의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가 오늘날 고난의 팬데믹 상황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작품을 연출했다고 밝혔다.

 성탄특집, KBS1 ‘머슴 바울, 김창식’ 예고편

▣다큐속으로
1888년 서른한 살의 김창식은 올링거 선교사의 집에 머슴으로 들어간다. 당시 저잣거리에 퍼져 있던 괴소문(Baby Riots, 서양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해서 삶아 먹는다는 영아소동)에 격분해 직접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머슴을 친절하게 대하는 선교사 부부에게 점차 감화되기 시작하고, 올링거 선교사가 건넨 성경에서 ‘산상수훈’ 구절을 만나면서 삶이 바뀌기 시작한다.

같은 해, 아펜젤러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정식 교인이 된 김창식은 이후 제임스 홀 선교사를 만나 평양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되지만 평양 기독교도 박해사건과 청일전쟁의 시련과 고난을 만났다. 머슴 김창식은 그런 고난들을 이겨내고 마침내 1901년 조선인 최초의 목사가 된다.

고난 속에서도 김창식과 홀 선교사 부부의 인연은 깊어진다. 제임스 홀 선교사는 평양 감옥에 갇힌 김창식을 구해내고, 김창식은 의사인 홀 선교사 부부의 동역자가 되어 전쟁 부상자들과 전염병 환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한다.

사랑과 헌신은 대를 이어 계속됐다. 김창식 목사의 아들 김영진과 홀 선교사 부부의 아들 셔우드 홀은 훗날 의사가 되어 해주 구세병원에서 재회하고, 결핵 환자 치료에 뜻을 모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한다. 두 아버지에서 두 아들로 이어지는 감동 실화가 크리스마스 씰의 탄생 스토리에 담겨 있다. 사랑과 우정의 감동 이야기를 뮤지컬 다큐로 감상할 만하다.

▣김창식과 선교사
여러 자료에 의하면, 김창식(金昌植) 목사는 1901년 5월 14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김기범과 함께 한국인 최초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평생 48개 교회를 개척했고, 125곳의 교회를 맡아 일했다.

김창식은 젊어서 고향을 떠나 전국을 방랑하며 양반집 머슴과 마부, 장돌뱅이, 지게꾼 등 안해본 일 없이 살았다. 그렇게 살다가 서울로 와서 남대문 시장에서 막일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던 그에게, “선교사들이 조선 아이들을 유괴하여 노예로 팔거나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1888년, 김창식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감리교 선교사 올링거(Ohlinger)의 집에 ‘위장 취업(?)’해 들어갔다. 선교사 집 문지기로 출발해 행랑아범처럼 마당을 쓸고 장작 패면서, 선교사가 지방 전도를 나갈 때 그가 탄 말을 끌었다. 그러면서 선교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참고로, 프랭크린 올링거 선교사(Franklin Ohlinger/1845~1919)는 우리나라 문서선교와 출판문화 근대화의 선구자이다. 그는 1845년, 미국에서 독일계 이주민의 후예로 태어나 저먼-왈라스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870년부터 17년 동안 중국 선교사로 헌신했다.

올링거 선교사와 협성회보 그리고 삼문출판사
올링거 선교사와 협성회보 그리고 삼문출판사

올링거는 1888년 조선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들어와 약 6년 동안 헌신했다. 그는 배재학당 교사로 일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배재학당 안에 설립하고 ‘누가복음젼’을 비롯한 성서와 여러 전도문서를 출간하여 문서선교의 초석을 놓았다. 

김창식은 얼마 후 요리사로 인정받아 올링거 선교사 가족들의 안방 생활까지 관찰했다. 현장을 잡으려 감시를 늦추지 않았고, 이웃 선교사들의 집도 예의주시했다고 한다.

그렇게 2년 동안 올링거 선교사 집 ‘하인’으로 살면서 선교사들을 감시했지만, 소문으로 들었던 일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헛소문인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그의 ‘주인’인 선교사 가족들뿐 아니라 주변 선교사들의 행동은 조선 양반들과 달리 겸손하면서도 권위가 있었다.

특히, 하인에 불과한 그를 따뜻한 말과 미소로 대하는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아, 기독교가 어떤 종교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런 그에게 올링거는 한글 쪽복음 <마태복음>을 주면서 “5장부터 읽어보라”고 했다. 거기서 그는 가난하고, 슬퍼하고, 목마르고,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복음을 읽었다.

선교사들은 그의 질문에 상세히 답했다. 지금까지 이런 ‘주인’은 만나본 적 없던 그는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아펜젤러 선교사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

▣김창식과 제임스 홀 선교사
예수 믿고 세례 받은 김창식은 선교사들의 부탁에 ‘전도인’으로 나섰다. 1893년 감리교 선교부가 평양 개척을 결정하자, 그는 제임스 홀 선교사와 함께 평양으로 올라가 서문밖에 진료소를 겸한 예배당을 마련하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홀 선교사와 김창식 목사.
제임스 홀 선교사와 김창식 목사.

1년 후, 수구파 평양 관찰사 민병석이 기독교 확산을 막으려 교회 지도자 10여 명을 체포해 배교를 강요하며 고문을 가했다. 대부분 굴복하고 나왔지만, 김창식은 마지막까지 “주님을 배반할 수 없다”고 버텼다. 얻어맞아 초주검 상태에서 선교사들의 항의로 풀려났다.

선교사들이 그에게 ‘조선의 바울’이란 별명을 붙여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후 소천받기까지 그는 바울처럼 전국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김창식 전도인은 1894년 여름 청일전쟁으로 또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됐다. 전쟁의 기운이 돌자, 선교사와 가족들은 서울로 철수했다. 김창식은 약탈과 살인이 난무하며 괴질이 유행하던 평양성에 남아 상처받은 양떼들을 돌봤다. 

그는 이제 선교사 없이 혼자서도 일할 수 있는 성숙한 전도인이 됐다. 이에 1899년 다른 곳으로 개척을 떠나 교회를 지었고, 나름의 직책이 필요해졌다.

1901년 5월 9-14일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린 제17회 한국선교회에서는 김창식과 김기범을 목사로 안수했다. 한국교회 최초로 한국인으로서 목사안수를 받은 것이다. 장로교회는 훨씬 후인 7년 뒤에 길선주 외 6명이 안수를 받았다.

김창식은 목사 안수 후 선교사들의 동역자로 사역하기 시작했다. 1904-1910년에는 영변구역장으로 일했고, 1912년 평양서지방 감리사, 1913년 영변지방 감리사가 됐다. 영변지방은 새로 생긴 지방으로, 평양 서지방 다섯 고을보다 4배 큰 지방이었다.

산세가 험해 한 번만 순행해도 1,720리나 됐는데, 이 넓은 지역을 1년에 2-3번씩 심방했다. 선교사들은 자동자전거(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지만, 김 목사는 주로 도보로 다녔다.

1918-1921년 수원 지방의 순행목사로 파송 받아, 감리사 노블과 독립운동을 직·간접으로 돕기도 했다. 1921년 독립운동의 책임을 물어 노블 선교사는 평양으로, 김창식 목사는 해주로 각각 흩어졌다.

그때 해주에는 김창식 목사의 아들인 닥터 김(김영진 장로)이 있었다. 김창식 목사는 해주에서 1922년 사경회를 인도하다 고혈압으로 쓰러져 7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다, 1929년 1월 9일 72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