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목사, ‘꿈과 소망’ 전한 목회자 ... "전 세계 80개국, 지구 120바퀴 돌며 전도 ... 편히 쉬소서!!!"
조용기 목사, ‘꿈과 소망’ 전한 목회자 ... "전 세계 80개국, 지구 120바퀴 돌며 전도 ... 편히 쉬소서!!!"
  • 나관호 발행인
  • 승인 2021.09.15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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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때 폐결핵 3기, 6개월 사망선고/ 
복음 접한 뒤 말씀과 함께 치유경험/
최자실과 벽돌교회·천막교회 세워 개척/
여의도 이전, 1981년 성도 20만명 넘어서/
전 세계 80개국, 지구 120바퀴 돌며 전도

【뉴스제이】 영산 조용기 목사가 2021년 9월 14일, 오전 7시 13분쯤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조 목사는 지난해 7월 자동문에 머리를 부딪혀 뇌출혈로 병원에서 수술 후, 치료와 재활운동을 해오던 중 소천했다.   

조용기 목사는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산 울주군 진장에서 부친 조두천 장로와 모친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 목사 어린시절 가족사진 : 좌측 부친 조두천 장로 앞이 있는 어린이가 조용기 목사)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故 조용기 목사는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산 울주군 진장에서 부친 조두천 장로와 모친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 목사는 부친의 영향으로 한학과 전통적인 불교문화에 익숙한 가정에서 자랐다. 

1958년 순복음신학교 제4회 졸업식에서 최자실 전도사와 함께한 조용기 전도사(좌).       ⓒ여의도순복음교회
1958년 순복음신학교 제4회 졸업식에서 최자실 전도사와 함께한 조용기 전도사(좌).       ⓒ여의도순복음교회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부친이 낙선한 뒤 가세가 급격히 내려 앉아 가난한 사춘기를 보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집이 불타는 등 어렵게 되어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천막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가도모습
천막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가도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 벽지는 신문지, 강대상은 사과상자로 만들었던 천막교화 시절       ⓒ여의도순복음교회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기술자가 되려고 부산공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소년 조용기의 꿈은 내과의사가 되는 것이어서 꿈을 가지고 영어 공부를 했다. 마침 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 부대원들과 만나 영어를 공부회화를 공부했고, 학교장과 미군 부대장 사이의 통역을 맡으면서 영어 실력을 더욱 키우기도 했다.

기도하는 최자실 전도사(좌)와 조용기 전도사 그리고 김성혜 사모(우)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한 조용기 전도사(우측 두번째)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사들과 함께 한 조용기 전도사(우측 두번째) ⓒ여의도순복음교회

고등학교 2학년 17세 때, '폐결핵 3기'로 길면  6개월이라는  사망선고를 받고 병상에 있던 중, 누나의 친구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에수님을 영접하개 된다. 그후 성경에 사로 잡혀 살다가 환상 중에 예수님을 만나 '인생을 드린다'고 서원하고 치유된다 그후 부산에서 미국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소속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의 집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고, 그후 여러 선교사들의 집회 통역을 하면서 부르심을 확인한다. 

조용기 목사의 20대 후반과 30대 모습
조용기 목사의 20대 후반과 30대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개척 초기 최자실 당시 전도사와 산소통으로 ‘복음의 종’을 울리던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개척 초기 최자실 전도사와 산소통으로 ‘복음의 종’을 울리던 조용기 전도사(우)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이후 폐결핵이 치유되는 신유의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다. 1956년 9월, 20세 때 하나님의성회 서대문 ‘순복음신학교’에 수석입학하여 후에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가 된 최자실 목사와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벽돌집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후에 남대문에서 미군부대 구멍 난 중고(?) 천막을 사와 천막교회를 개척했다. 먼저, 최자실 전도사는 아이들을 모아 '고아원 교회학교'를 하고 있었다. 

벽돌집교회 옆에 천막을 이어 붙여 천막교회로 넓혔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가대 지휘하고 있는 김성혜 사모    ⓒ여의도순복음교회
성가대 지휘하고 있는 김성혜 사모        ⓒ여의도순복음교회

그 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서대문로타리로 교회를 이전했고, 현재의 자리에 있는 여의도 성전으로 이전하며 성장을 이어갔다.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졌고, 1973년 9월 여의도 성전이 완공 되면서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대회였다.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서대문 순복음중앙교회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1967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센트럴홀에서 설교하는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1967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센트럴홀에서 설교하는 조용기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교회를 여의도로 이전한 뒤 성장세는 더욱 커져, 1979년 10만 명, 1981년에 2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 (CGI / Church Growth 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당시 세계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의도성전 건축 중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1981년, '20만 성도돌파 예배' 후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고, 강력한 성령운동이 전개됐다. 구소련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조 목사의 솔로몬군도 집회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의 솔로몬군도 집회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이렇게 조 목사는 첫 해외로 나간 1964년부터 2019년까지 80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고, 비행 여정을 보면 지구를 120바퀴 이동한 셈이었다.

조용기 목사의  아랍에미레이트 집회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치유의 기적이 넘쳐났던 100만 명이 모인, 인도 마드라스대성회
치유의 기적이 넘쳐났던 100만 명이 모인, 인도 마드라스대성회     ⓒ성회영상켑처

조 목사는 국내에서 민족복음화운동에도 헌신하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에서 성회를 인도했다. 특히 사회 구원을 위해 1988년 일간지 국민일보를 창간해, 기독교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전하기 시작했으며, 1999년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굿피플)을 세워 국내 및 해외에서 인권 환경 보건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홀트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수상했다.

꿈과 소망을 전했던 조용기 목사          ⓒ국민일보

또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보건복지부)’을 받았다.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     ⓒ국민일보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하고, 2007년 미 연방의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도 받았으며, 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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