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그들은 누구인가? ... 파슈툰족에 바탕을 둔 부족단체 반군 테러조직
탈레반 그들은 누구인가? ... 파슈툰족에 바탕을 둔 부족단체 반군 테러조직
  • 나관호 발행인
  • 승인 2021.08.28 1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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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반, 남녀차별 정책 세계에서 비판/
탈레반, 오사마 빈라덴 숨겨줘/
9.11테러 주범, 오사마 빈라덴 /
우리 정부 도운 협력자와 가족 390명 구출/

【뉴스제이】 탈레반(다리어: طالبان‎ 탈레반) 또는 탈리반(파슈토어: طالبان 탈리반)은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파슈툰족에 바탕을 둔 부족단체에서 출발한 반군 테러조직이다. 

탈레반은 1990년대 중반 활동을 시작, 지도자 무하마드 오마르를 중심으로 결속해 1997년 아프카니스탄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2001년 미국의 공격으로 축출되기까지 아프간을 통치했다. '얼굴없는 지도자', '애꾸눈 지도자'로 알려진 무하마드 오마르는 추종자들 사이에 '물라'(mulla;mullah)라는 호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탈리브'에 상대되는 말로 '스승'이라는 뜻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정권을 잡았을 당시 남녀차별 정책으로 인해 세계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 내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 전투 요원들의 모습.(사진=로이터)
아프가니스탄 내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 전투 요원들의 모습.(사진=로이터)

소련, 1989년에 아프간에서 군대 철수
아프가니스탄은 1979년 옛 소련군의 침공을 계기로 소련의 점령 하에 들어갔으며 이슬람 조직들을 중심으로 미국 등의 지원을 받은 저항세력들이 10년 이상 반 소련 항쟁을 벌였다. 

1989년 소련은 아프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아프간에선 1990년대 들어서면서 정전불안이 계속됐고 정부의 공백을 틈타 군벌들이 내전을 벌였다.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등 냉혹한 군벌들은 카불 시내를 폭격해 수천 명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등장한 탈레반은 엄격한 이슬람 규율로 무장하고 전국을 빠른 속도로 장악해갔다. 카불의 무력한 기득권층과 북부 양귀비 재배 지역에서 아편 매매 수입으로 횡포를 부리던 이른바 마약 군벌들과 경합하다가 1997년에는 정권을 장악했다.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을 ‘탈레반’이 예전부터 숨겨주고 있었다.     ⓒ나무위키

탈레반, 오사마 빈라덴 숨겨주다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을 ‘탈레반’이 예전부터 숨겨주고 있었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였다. 

‘탈레반’은 미국의 힘 앞에 저항하지 못하고 6일만에 주요 도시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2011년까지 미국은 오사마 빈라덴을 찾지 못했으며,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사람들만 죽인다며 비판을 받아왔다. 2011년 5월 1일 버락 오바마가 서명한 작전에 의하여, 오사마 빈라덴이 사살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으며,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면서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접수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정책
‘탈레반’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옛 소련의 영향력에서 아프간을 빼낸다는 쪽에 무게를 둬 경계를 하지 않았었다. 실제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민주적 투표로 집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성이 있는 정권으로 인정을 받았다. 국제사회의 공인은 몇몇 나라에서 받는 데 그쳤으나 아프간 내 지지율은 60% 이상이라는 조사결과가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뒤에는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이 도마에 올랐다. 부정부패를 청산하는 숙청작업에 그치지 않고 언론을 탄압하고 거의 대부분의 방송국을 폐쇄했으며 서방 문화를 전파하는 언론 활동을 엄금시키고 종교 자유를 억압했다.

특히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한 것은 여성의 교육을 전면 엄금시키고 모든 여성들을 집안에 감금시킨 ‘탈레반’의 조치였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 부인 등이 나서서 국제무대에서 탈레반을 비판했던 원인은 바로 ‘탈레반’의 여성탄압 정책이었다. 

‘탈레반’은 ‘부르카’(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검은 옷) 착용을 의무화한 것은 물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전면 금지시키고 심지어 집 밖에 여성이 혼자서, 혹은 여성들끼리 외출하는 것도 막았다. 남성이 특정 여성을 간통했다고 지목하기만 하면 여성을 유죄판결에 돌로 때려죽이게 하는 끔찍한 사형제도도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은 예로부터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고 사회활동도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보다 훨씬 활발하게 벌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여성들에 대한 이같은 탄압이 가져온 충격은 더욱 컸다.

9·11 테러와 오사마 빈라덴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 수단에서 미군을 공격한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간에 오래전부터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1996년부터 탈레반 정권의 보호 아래 아프간에 숨어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오사마 빈라덴은 반 소련 전쟁 당시 함께 저항운동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등지에서 9·11 테러가 벌어지자 미국은 곧바로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라덴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며, 그 해 11월 오사마 빈라덴을 색출한다며 아프간 전쟁을 시작했다. B2 스텔스기, 무인정찰기 프레데터 등을 총동원한 미국의 막강한 화력 앞에 탈레반은 변변한 저항도 못 한 채 무릎을 꿇었다. 미국은 이 전쟁에서 무력한 아프간을 상대로 재래식 폭탄으로서는 사상 최악의 폭탄이라는 MOAB 폭탄까지 사용하려 했다가 거센 비판을 받고 철회했으나, 집속탄을 마구 뿌려 아프간의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피해를 입힌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 정권은 축출됐으며 무하마르 오마르는 동부 파키스탄 접경지대로 피신했다. 그러나 미국의 침공 이래 5년이 지나도록 미군은 빈라덴을 잡지 못했으며 오사마는 2006년말까지도 건재한 채 오히려 남부에서 탈레반을 재규합하고 있었다. 

미국의 탈레반 추출
미국은 ‘탈레반’을 축출하고 반소련 독립항쟁 지도자의 아들로 신망있는 친미파 지도자였던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간 새 대통령으로 내세웠다. 카르자이는 집안의 명망과 미국의 지원 등에 힘입어 과도정부를 이끌었으며, 이후 실시된 선거에서 정식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카르자이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전후 관리 책임을 맡았으나, 아프간 내 고질적인 정치적 분열과 남부의 계속되는 전투 때문에 정국을 효과적으로 장악하여 난국을 해결하지 못했다. 

미국은 아프간을 공격하고 '치안유지군'(ISAF)이라는 이름으로 다국적군까지 불러들였으나, 탈레반을 완전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탈레반이 극단주의 때문에 안팎의 비판을 받긴 했으나, 여전히 아프간인들 상당수, 특히 남부 칸다하르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국 철수 후, ‘탈레반’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을 점령하면서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접수했다.

약속지킨 대사관 직원과 아프간 현지인의 포옹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 정부의 활동을 지원해온 현지 협력자와 그 가족 390명 전원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작전명 ‘미라클’
아프가니스탄에서 우리 정부의 활동을 지원해온 현지 협력자와 그 가족 390명 전원이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들은 난민이 아닌 특별기여자로 받아들였다.

이번 수송의 작전명은 ‘미라클’(기적)이다. 미군 철수 이후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세력 탈레반이 다시 정권을 거머쥔 아프가니스탄에서 삼엄한 경계를 뚫고 아프간인 76가구를 극적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미국과 탈레반 간 사전 합의에 따라 공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미국 계약 버스 6대를 확보해 아프간 협력자들에게 교통편을 제공했다. 카타르에 대피했던 한국 대사관 직원 4명이 카불로 복귀한 뒤 미국과 직접 교섭에 나서 각국과의 카불 공항 운송편 쟁탈전에서 승리했다. 일본의 귀환인원은 0명이다. 한국에 외교력에 있어서 일본을 크게 앞선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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