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어머님 은혜’, 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 ...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하나 있지”
[영성칼럼] ‘어머님 은혜’, 윤춘병 작사 박재훈 작곡 ...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하나 있지”
  • 윤사무엘 목사
  • 승인 2021.05.06 12: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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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주일, 1930년 구세군에서 시작/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 ‘어머니 날’ 불려/
"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아"/

【뉴스제이】 한국 교회에서 “어머니 주일”을 지키기 시작한 것은, 1930년 구세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어머니 주일의 정신을 일반 대중에게도 전한다는 의미에서 1955년 5월 8일(주일)을 “어머니 날”로 제정, 공포하였습니다. 1960년 어머니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개칭하였습니다. 

해방 후 “어머니 날”에 널리 부른 노래가 바로 “높고 높은 하늘이라 Mother's Love”로 1946년에 윤춘병(尹春炳 1918~2010) 목사님 작사에, 박재훈(朴在勳 1922~ 캐나다 토론토 큰빛교회 원로) 목사님의 작곡하신 노래는 《어린이 찬송가, 1953》 99장에 발표된 이후 널리 애창되어, 마침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채택되어 ‘어머니 날’에 널리 불려졌습니다. 

윤춘병 목사님은 평남 중화에서 태어나셨는데 저의 큰 삼촌벌 되십니다. 오소운 목사님에 의하여 이 노래를 작사하게 된 배경을 듣게 됩니다.

윤 목사님은 평양 요한학교, 중앙신학교 등을 거쳐 감리교 목사가 되셨고,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초대 감독으로 은퇴하셨습니다. 8.15 해방을 맞은 그 해로 윤 목사님께서 월남을 하셨습니다. 서울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건만 친구 하나 없는 그분에겐 허허벌판과 같았습니다. 영양실조에다 과로로 인해 병석에 눕고 말았으나, 간호해 주는 이 하나 없을 뿐만 아니라 약 한 첩을 쓰지 못하는 형편이어서 병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크셨다고 합니다. 

조용한 방에 혼자 누웠노라면 기슴을 깎는 고독에 그분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누구하나 따뜻하게 찾아주는 이 없는 나의 외로운 병상. 잠들면 꿈속에서 고향 길을 헤매었고 깨어나면 생각 속에 고향 길을 오고 갔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고향 길을 오가노라 그의 마음은 창 밖으로 흐르는 구름을 따라 38선을 넘나들었습니다. 

윤목사님이 38선을 넘어오던 날, 마을 뒤 읍으로 가는 큰 길 가에는 행인들이 쉬어 가는 늙은 소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그 소나무 밑에까지 따라 오신 어머님은 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시며 “인제 가면 언제 오는 거냐?” 목 메인 소리를 남기고는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지켜보시던 모습이 병상에 누운 윤목사님의 눈에 어른거렸다고 합니다.

윤춘병 목사님은 “어머님께서 내가 병들어 누운 것을 아시면 얼마나 애타 하실까?” 이런 생각을 하며 창밖에 흐르는 흰 구름을 따라 고향 하늘을 더듬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늘은 높고 푸르기만 한데, 그 하늘보다 더 높고 더 푸른 건 어머님 사랑. ‘어머님 은혜’야말로 하늘처럼 넓고 하늘처럼 다정하구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1946년 4월에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 지은 작시가 '어머님 은혜'로 탄생되었습니다.

윤춘병 목사님(좌)과 박재훈 목사님
윤춘병 목사님(좌)과 박재훈 목사님

작곡자 박재훈 목사님은 1922년 강원도에서 박창숙의 4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보통학교를 마치고 평양으로 가서 요한학교에 입학, 장수철, 윤춘병 등과 함께 1943년 3회로 졸업하셨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곧 학도병으로 끌려갔습니다. 훈련소에서 도망쳐 귀국, 평남 강서군 문동국민학교의 교사로 교편을 잡은 그는 이유선(李宥善, 1911-2005) 교수에게 작곡법을 배웠습니다.

1946년 4월에 월남하여 서울 용산에 있는 금양국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46년 그 동안 작곡한 동요들을 모아《일맥동요집》을 출판하였습니다. 바로 이 해에 ‘어머니의 은혜’를 작곡해서 발표했습니다. 

그는 대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로 자리를 옮긴 후, 야간으로 새로 설립된 중앙신학교에 입학 제1회로 졸업하셨습니다. 6・25 사변 때에는 해군 정훈음악대에 복무하였습니다. 전쟁 후에는 기독교방송 음악과장, 영락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일하였습니다. 1959년 미국에 유학간 그는 웨스트민스터합창대학, 크리스천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귀국하여 한국찬송가위원회 간사로 있으며 음악전문위원으로서《개편 찬송가, 1967》편집을 도왔습니다. 장수철이 세상을 뜬 후 그의 후임자가 되어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을 이끌고 북미 지역을 순회 연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65년부터는 숭전대학, 장로회신학대학, 서울신학대학, 서라벌예술대학, 한양대학교음악대학, 서울대학교음악대학 등의 강사로 출강하였으며 캐나다로 이민하여, 1982년 회갑을 넘긴 그는 미주 한인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84년 토론토에 큰빛장로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다가 1990년 정년 은퇴하셨습니다. 그후 큰빛장로교회는 임현수 목사님께서 부임하셔서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셨습니다.

임현수 목사님은 1997년부터 150회 북한을 방문하여 18년간 북한 돕기에 최선을 다하다가 “김일성 대신 하나님을, 김정일 대신 예수님을 믿고 당대신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설교가 문제가 되어, 2015년에 갑자기 억류되어 2년 7개월간 독방에서 고생하시다가 캐나다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 지금은 은퇴하시고 인천 송도에 살고 계십니다.

박재훈 목사님은 ‘어머니의 은혜’를 작곡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십니다.

“매해 어머니날이 되면 한국교회 어린이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찬미 ”어머님 은혜“는 1946년에 윤춘병 감독님이 서울에서 작사하고 내가 작곡한 노래다. 1938년 내가 평양 요한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 때, 윤형은 장수철 형과 함께 3학년이었다(중략). 해방 후… 남하하여 살던 서울 어느 거리에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의 형님 박재봉 목사께서 한강 건너 흑석동에 살고 있었기에 나의 안내로 우리는 형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둘이서 전차를 타고 노량진 쪽으로 가면서 여러 가지 얘기를 하던 중, 5월의 어머니 주일이 다가오므로 어머니의 은혜를 담은 노래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전차에서 내려 흑석동 고개를 넘으면서 어느 양지바른 곳에 이르러서 잠깐 쉬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윤형이 무엇인가 종이에 긁적긁적하더니 “이게 노래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어머님 은혜」이다.” [내 마음 작은 갈릴리] : 박재훈 지음, 서울 성실문화사, 2002. 41-42쪽.]

1. 높고 높은 하늘이라 말들 하지만 / 나는 나는 높은게 또하나 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님 은혜 / 푸른 하늘 그 보다도 높은 것 같아

2. 넓고 넓은 바다라고 말들 하지만 / 나는 나는 넓은 게 또하나 있지.
사람 되라 이르시는 어머님 은혜 / 푸른 바다 그보다도 넓은 것 같아

3. 산이라도 바다라도 따를 수 없는 / 어머님의 그 사랑 거룩한 사랑
날마다 주님 앞에 감사드리자 / 사랑의 어머님을 주신 은혜를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교회 담임 / 겟세마네신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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