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칼럼] 코로나 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새로워지는 길 ... “세상 속에서 ‘녹아짐의 영성’으로 스며 들어가야 한다”
[십자가칼럼] 코로나 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새로워지는 길 ... “세상 속에서 ‘녹아짐의 영성’으로 스며 들어가야 한다”
  • 나관호 발행인
  • 승인 2021.03.0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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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교회에 바란다 《16》

교수목사의 입장에서 한국교회를 살펴보고, 진단(?)하고 나아가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를 찾고자 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더 새로워지고, 세상을 향해 성경적 소리를 내고, 귀한 십자가 사랑을 바탕으로 '예수운동'(Jesus Movement)을 전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모든 글과 생각나눔이 "한국교회 자정운동"의 씨앗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뉴스제이】 ‘작음의 영성’에 대한 칼럼을 쓴 후, 혹시나 했던 예상이 들려옵니다. 그것은 대형교회나 큰 성전을 가진 교회에서 나오는 ‘오해’(5해)입니다. 아니 오해를 넘어 ‘구해’(9해) ‘십해’(10해)입니다. 글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고 ‘작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만든 마음일 것입니다. 그러나 옳은 말을 했다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작음의 영성’은 대형교회를 비판하고 큰 성전을 가진 교회를 낮추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흥’이라는 말을 비하하는 말도 아닙니다,(참고기사[은혜칼럼] 코로나시대 교회와 목사, 성도가 사는 길 ... "작은 것, 좁은 문, 즉 ‘작음의 영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글을 잘 읽어보십시오. 큰 것만을 좇지 말고, 큰 것 속에서 성경적인 작은 것을 되찾고, 새롭게 해서 미래를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 제목에 드러낸 것처럼 “코로나 시대~~”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시며 하나님은 크시지만 동시에 작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뉴스제이

예수님께 결재 도장을 찍어 달라고 간구

저는 글을 쓰면서, 다 써놓고 고민을 했습니다. 이런 글을 한국교회 앞에 내 놓는 것이 좋을까? 큰 교회 소유한 목사들 속에서 뻔한 반응이 예상되고, ‘부흥’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기도와 묵상 그리고 거룩한 고민을 하면서 예수님께 결재 도장을 찍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며칠 후, 결재가 났습니다. 그것은 전지전능하시고 위대하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은 크시지만 동시에 작은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가지 예로 우주에 비하면 태양도 먼지보다 작습니다. 그렇다면 태양에 비해 인간은 먼지보다도 더 작습니다. 우리를 공격한 보이지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 같은 존재입니다. 

우주는 무한대 하나님에 비하면 먼지보다 작습니다. 하나님을 크기로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또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태양에 비해 바이러스 만한 크기의 인간 속으로 들어오셔서 ‘동거동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작아야 합니까? 전지전능하신 무한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이게 성경적 ‘작음의 영성’에 대한 예수님의 결재 도장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그렇게 깨닫고 당장 칼럼을 공개했습니다. ‘작은’에 대한 성경구절을 더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중 ‘작음의 영성’ 칼럼에서 밝혔던 에피소드,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마가복음 3:9) 말씀에서 ‘예수님이 타신 배는 작은 배였구나’ 고로, ‘목사들도 작은 차를 타면 어떨까’라고 흥미로운 생각 말입니다. 성경적이지 않습니까? 

대형교회 목사 어느 누군가가 과감하게 ‘작은차 타기운동’을 벌인다면 분명, 차의 크기와 브랜드로 사람을 평가하고 줄 세우는 우리 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고,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을 향해 일반인들의 평가가 달라지고 그것은 예수님을 높이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아가 정부 관료를 향한 쓴소리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차 타기운동’을 정부 공무원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아마 ‘새마을운동’처럼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제안합니다.” 공은 이미 던져졌습니다. 


‘작음의 영성’과  ‘녹아짐의 영성’은 같은 짝

‘작음의 영성’과 같이 가는 것이 ‘녹아짐의 영성’입니다. 같은 짝입니다. ‘녹음의 영성’이라고 하려다가 지난 칼럼에서 ‘녹음목사 녹음성도’에 대한 말을 해서 ‘Recorder’(녹음)로 잠시 이해할까봐 ‘녹아짐의 영성’으로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녹아짐’이라는 표현이 내 글의 의도와 더 가깝습니다, ‘녹아짐’은 얼음덩어리 스스로 녹이는 언어면으로는 ‘동사’(動詞, Verb)적이며, 현상으로는 스스로 즉 ‘자가’(自家. Self)적인 의미를 줍니다. 그래서 ‘녹아짐의 영성’ 표현이 적합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밖이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태복음 5:13-1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은 흔히 “크리스천은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경에 비추어 보면 2% 모자랍니다. 성경은 이미 우리 존재가 이미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소금'을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소금과 빛'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금과 빛’으로 이미 되어져 있으니 세상에서 그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금과 빛’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은 세상에 녹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녹아짐 영성’입니다. 빛의 녹아짐은 강하고 큰 빛인 ‘써치 라이트’(Search light)가 아니라, 은은함입니다. 대형 ‘써치 라이트’는 언제 사용합니까? 말 그대로 찾아내는 것인데 교도소 담장을 넘는 탈출자나 철책을 넘는 간첩을 찾아내는데 사용합니다, 
  

써치 라이트'NO', 소금덩어리 'NO'

강한 빛이 좋다고 해서 광화문에서 시청 쪽으로 설치해 놓고 날마다 건물과 도로 그리고 인도를 비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고의 연속일 것이며 사람들의 일상이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저녁노을 같은 은은한 빛으로 광화문 여러 건물벽을 비추고 도로와 인도에 비추게 한다면, 은은함은 장관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은은한 빛은 스며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행복하게 합니다. 등대는 강한 빛이지만 멀리 넓게 비추며 은은한 빛으로 길을 인도합니다, 이렇게 빛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은은함으로 사람들 마음과 영혼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소금의 ‘녹아짐’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더 잘 녹기 위해서는 알갱이도 더 작게 잘라져 ‘작음의 영성’으로 만들어지면, 소금은 더 잘, 빨리 녹게 될 것입니다. 작을수록 더... 

그런데 소금에 대해 아이러니한 것은 동유럽이나 중국, 이스라엘에 가면 소금광야와 소금산, 거대한 소금광산이 있습니다. 소금이 덩어리로 존재합니다. 그것은 맛을 내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거대한 크기의 소금산은 모래보다도 못합니다. 소금은 녹아져야 자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돌아보고, 한국교회를 돌아보면서 우리의 삶이 써치 라이트처럼 크고 강한 빛만을 내려하고 소금인데 녹기보다 덩어리로 뭉치고 커지려고 한 적은 없는지 냉정하게 되돌아 봐야합니다.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 속에서 선한 일, 구제 사역을 제일 많이 하면서도 때론 지탄을 받는 것은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녹아지지 못해 사회의 강함과 덩어리의 이질감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빛과 소금 대해 다양하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이사야 2:5)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 60:1)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태복음 5:14)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레위기 2: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태복음 5:13)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로새서 4:6) 

그 외에도 소금과 빛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소금은 성결하게 하는 도구임' (출 30:35) /
'모든 소제물에는 소금을 침(정결과 소독)' (레 2:13) / 
'전쟁 후, 점령지 백성 죽이고 성 헐고 소금뿌림' (삿 9:45) /
'소금 골짜기는 이스라엘의 승리 장소' (삼하 8:13) / 
'소금이 맛을 잃으면 맛을 되찾지 못함' (막 9:50) / 
'소금은 화목하게 하는 도구 역할임' (막 9:50) /
'은혜 가운데서 말로 소금 맛을 내야 함' (골 4:6)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가는 길에 빛으로 나타나심' (시 119:105) /
'의인들은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난다' (마 13:43) /
'내 안에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살펴야 함' (눅 11:35) /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게 됨' (요 3:20) /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행함 나타내야 함' (요 3:21) /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요 12:46) /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드러남' (엡 5:13) /
'하나님 존재 자체가 빛이시고 어두움이 없으심' (요일 1:5) /
'주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함' (요일 1:7) /

세상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입니다.        Ⓒ블로그 Worship Design
세상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입니다.        Ⓒ블로그 Worship Design

세상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

‘작음의 영성’과 ‘녹아짐의 영성’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하나가 아닌 동전의 앞뒤처럼 같이 동행해야합니다. 작아져야 녹아지고, 녹아지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빛과 소금입니다. 빛은 은은한 빛과 소금은 작은 알갱이가 되어 세상 속에 녹아져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녹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 안에서 '녹아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유난히 세상에 대해 배타적이었습니다. 세상은 사단이요, 세상은 사단이 지배하며 사단의 영역처럼 생각해, 교회 안에서만 빛과 소금이 되려고 했던 모습들이 있습니다. 세상 자체는 사단도 아니고 사단의 영역도 아닙니다. 세상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지옥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거룩거룩거룩하다며 말하는 모든 성도의 삶과 마음에서 사단이 나타나지 않나요? 목사와 전도사, 장로와 권사 그리고 성도 안에서 거짓말과 이간질, 분냄과 당짓기, 돈사랑과 횡령(?)은 없나요?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속에서 ‘녹아짐의 영성’으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썩지 않게, 소독제로 사용되고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착함과 선행을 나타냄으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세상을 떠나려는, 속세를 떠나 산과 굴로 가려하지만, 기독교는 세상 속으로 내려 가는 종교입니다. 부패한 땅이 썩지 않게, 어둠의 땅을 밝히는 역할을 하는 사명,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하늘명령'입니다.   


구글 계정, 목사 스스로 관리하세요

글을 마치며, 목사님들과 부교역자들 그리고 비서들에게 Tip 하나를 말하고 싶습니다. 한가지 담임목사들이 주의해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카카오톡 관리를 비서나 부교역자들 컴퓨터에 깔아 놓고 관리를 맡기지 마십시오. 어느 목사에게 카톡을 보내면 내용을 모르시더군요. 누군가 지운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교회에 갔을 때 인증번호를 받는다고 담임목사의 스마트폰을 가지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이패드 등 새 기계를 샀을 때 유튜브를 보기 위해서는 구글계정 로그인이 필요하니, 구글 비번을 비서나 부교역자가 관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증번호 관리나 구글 비밀번호 관리를 목사 본인이 직접 해야 할 이유는 개인정보나 개인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을 때는 좋지만 관계가 나빠지면 문제가 됩니다. 

한 예로, 구글 계정에 로그인 하면, 구글 포토(사진, 꽃잎모양) 아이콘에 자동으로 수년간의 사진이 수집됩니다. 그래서 만약 호기심을 갖은 비서나 담당 부교역자가 담임목사의 구글 계정으로 자기폰이나 컴퓨터에 로그인해 놓으면 목사들의 사진이 그대로 노출 저장되고, 검색내용까지 저장됩니다. 대부분 그럴 리는 없지만 혹여 사단이 작동하면 문제가 됩니다.

교회 유튜브를 위한 계정은 구글 계정을 따로 하나 더 만들어 사용하도록 하고, 목사님의 것은 스스로 비번관리하며 인증번호가 필요하면 폰을 내어주지 말고 직접 확인하고 확인번호나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그렇게 사생활을 보호해야 합니다. 악용되면 큰 문제가 작동할 요지가 있습니다.

목사님들은 구글 계정 ‘보안’ 폴더에서 목사님의 계정으로 로그인되어 있는 폰과 컴퓨터가 몇 대나 되는지 보시고, 본인 것이 아닌 것은 모두 로그아웃 시키십시오. 그리고 비서나 부교역자 중 목사님 구글 계정으로 로그인 시킨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지우십시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나관호 목사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문화평론가 및 칼럼니스트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조지뮬러영성연구소 소장/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치매가족 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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