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를 생각합니다" ... 3.1운동, 항쟁, 혁명이 발발한지 102돌에 역사속에서
"유관순 열사를 생각합니다" ... 3.1운동, 항쟁, 혁명이 발발한지 102돌에 역사속에서
  • 조광빈
  • 승인 2021.03.02 13: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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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서대문감옥에서 고문 고초 당해/
미아리공동묘지 이장 중 유골 사라져/

【뉴스제이】 20221년 3월 1일. 오늘은 3.1운동, 항쟁, 혁명이 발발한지 '102돌'입니다.

유관순 열사의 마지막 유언이 가슴을 저미게 합니다.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 디지털 복원 사진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16일 충청남도 천안 병천면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유중권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흥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작은아버지는 감리교회에서 일요일에만 교회에 올 수 있는 선교사들을 도와서 평일에 교회 일을 맡아보는 분이었지요.

공주에서 전도하던 감리교 선교사 사부인(미국이름 엘리스 샤프)의 권유로 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했으며, 보통과를 졸업한 1918년 이화학당 고등과에 입학하였습니다.

1919년 3월 10일 모든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유관순은 같은 이화학당을 다니던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합니다.

일본 헌병대는 유관순의 부친을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유관순을 체포하여 검사국으로 이송했습니다.

유관순은 공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이 선고, 다시 경성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징역 3년형을 받았으나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7년형으로 늘어났고, 교도소 안에서도 시위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혹독한 고문에 신음하다가 결국1920년 9월 28일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하였습니다.

당시 서대문감옥에서는 고문사실이 알려질 것을 우려하여 시신을 내주지 않으려고 했고, 이 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프라이 교장은 국제 여론에 호소하며 시신 인도를 요구한 끝에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시신을 인수하였으나 그렇게 돌아온 시신은 손톱과 발톱이 모두 다 뽑혀져 있었고 코와 귀가 잘려 나갔으며 머리카락이 가죽째 뽑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뿐인가요, 두 팔과 두 다리와 머리와 몸통이 여섯 토막으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1920년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김종우 목사 주례로 유관순의 장례식이 거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됐습니다. 하지만, 무덤에서도 편히 잠들지 못 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그 무덤조차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이태원 공동묘지가 일본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는 과정에서 유골이 없어졌기 때문에 이후 열사의 유골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관순 기념사업회(1947년 조직됨)에서 1989년 10월 12일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招魂墓)를 봉안하였습니다.
 
유관순이 일본에게 재판받을 당시 했던 말입니다.

"나는 당당한 대한의 국민이다. 대한 사람인 내가 너희들의 재판을 받을 필요도 없고, 너희가 나를 처벌할 권리도 없다!"

이렇게 외치던 꽃다운 나이 17세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장렬하게 순국한 유관순열사의 정신을 3.1절 오늘날에 되새기며,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세계열방을 깨우며 선교국 주자로서, 거룩한 제사장나라의 부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짐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조광빈 목사 (예심교회 / 아둘람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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