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칼럼] ‘3.1 만세운동’과 기도 그리고 나라사랑 ... "고국 구원하라는 사명받았다"
[영성칼럼] ‘3.1 만세운동’과 기도 그리고 나라사랑 ... "고국 구원하라는 사명받았다"
  • 윤사무엘
  • 승인 2021.02.26 0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 16인/
1919년, 인구 1,700만 중 기독교인 30만 명/
6월 30일에 투옥된 기독교인이 2,190명/
성경 속 경건 인물들, '애국'에 본 보여/

【뉴스제이】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된 지 20년 만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됨으로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양도 및 통감부 설치를 하였습니다. 이미 1903년 8월 24-30일 원산에서 캐나다의 하디(Robert Alexander Hardie: 남감리교 선교사, 1865-1949)선교사가 시작한 회개운동(자신의 교만, 선교의 실패고백)이 대부흥운동으로 발전되고 있던 차에 나라의 비운을 접하고 민족을 위한 기도회로 발전되었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원산뿐만 아니라 개성과 서울, 평양 등지에서 각종 기도모임과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위한 통성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907년 초에 하디가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영적 대각성운동을 인도하고, 길선주 장로의 인도로 시작된 ‘대부흥운동’에서 개인(경건주의)과 나라(복음주의)의 회개운동이 특별한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함께 역사하여 대부흥운동으로 전국 교회와 한국 전역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평양 대부흥운동이 시작된 지 12년 후인 1919년 3월 1일, ‘3.1 만세운동’의 원동력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한민족의 정치적 시련과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되는 등 국가적 위기 속에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정경분리 원칙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정치적인 일에 간여(干與)하지 않고, 하나님 앞으로 이끌고 가도록 권면하였지만, 당시 민족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국운동에 적극 나서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접목했던 것입니다. 

‘3.1 만세운동’은 한국교회의 경건주의와 복음주의가 나라 사랑과 조화된 모범적인 ‘경천애인’(敬天愛人) 신앙의 결과입니다. 1919년 '3·1 운동' 때 발표된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인이나 되며, 비서명자 48인 가운데도 24인의 기독교인이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전 인구 1천 7백만 중 기독교의 수는 30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전체 인구의 불과 2%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던 점을 감안할 때, ‘3.1 운동’에 기독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기미독립선언서'에 직접 서명한 목사님들 중에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고민하던 신석구 목사님의 경우, 선언서에 서명하는 문제를 놓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고민하시다가  2월 27일 새벽에야 "5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응답을 받고 참여하였답니다. 

길선주 목사님도 이승훈의 제안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정한 동기 역시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권고로 "고국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응답이 결정적이었습니다. ‘3.1 운동’ 때문에 일제에 의해 체포된 후 공소공판에서 "피고는 항상 일한 합병에 불평을 품고 조선독립을 희망하였는가?"라는 총독부 판사의 질문에, 이승훈의 경우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 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황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합병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였으랴?"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답도 이와 한결같았습니다.

‘3.1 운동’ 이후 이로 인하여 받은 교회의 피해는 막심하였습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를 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 수가 17동(제암리 감리교회 등),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그 외 교회당의 손해가 41동 등 총 82개 교회이고, 교회 재산의 손해액은 3만 달러, 오산중학교의 피해액은 5천 달러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30일에 투옥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및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으며, 교역자도 151명으로 천도교 직원 72명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하여, 각 지역에서는 조금씩 다른 날짜에 시작한 만세 운동이었는데, 대구는 1919년 3월 8일 신명학교(현 신명여고), 계성학교(현 계성고),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저의 모교)등 학생과 서문시장 상인과 주민 등 많은 군중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합니다.

성경의 경건 인물들은 나라 사랑(애국)에 본을 보였습니다. 왕,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사사들, 지도자들.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도록 기도했으며(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바울, 요한), 잘못될 때는 회개운동을 하였고(미스바 성회, 애가, 다니엘9장, 에스라9장, 느헤미야9장), 하나님 말씀의 회복 운동에 적극 동참했습니다(에스라, 느헤미야의 말씀 사경회). 

작년에 나는 대구 서문시장으로 가는 3.1운동길 또는 90 계단길 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이 길을 오르면서, 양옆에 태극기로 장식되어 있는 계단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복음 한국통일을 기도했습니다. 우리 모두 나라 사랑에 앞장섭시다.

 

윤사무엘 목사(겟세마네교회 담임 / 겟세마네신학교 학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