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호목사 칼럼] 두가지 오해에서 삶을 배우다
[나관호목사 칼럼] 두가지 오해에서 삶을 배우다
  • 나관호
  • 승인 2020.12.01 08: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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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목사의 행복발전소 130]
탄원서, 당사자가 제출하는 것 몰라/
‘나관호’ 소리음 ‘나가노’...일본사람으로 착각/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이사야 11:2)

【뉴스제이】 내가 60에 가까운 50년도 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은 아는데 나도 몰랐던 것이 있다는 사실 앞에 고개를 갸우뚱 한 적이 있습니다. 올봄, 교수로 제직 중인 친구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그것은 학과에서 제정을 담당하던 대학원 학생들의 연구비 관리 소홀로 다른 학생들이 고소한 사건으로 친구 교수도 책임자로 검찰에 같이 고소를 당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그 친구가 연구비를 착취할 사람은 아닙니다. 좋은 가정교육을 시킨 부모님을 잘 알고 있고, 대학시절에 같이 제자훈련을 받으며 헌신했던 친구는 분명 잘못하지 안했을 것을 믿습니다. 돈에 대해 욕심이 강해서, 마구 쌓아 두는 마음을 가진 친구가 아닙니다.  

내 친구는 물질 부족함이 없게 살면서 부모님 유산도 받았고, 부인도 직업이 있어 수익을 얻고 있습니다. 강남의 큰 아파트에서 누리고 살면서, 이웃을 돕고 사는 친구입니다. 내가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고 있을 때, 매달 병원비 절반을 친구가 보내주었습니다. 너무 고맙고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렇듯 물질을 나눌 줄 아는 친구이기에 안타까웠습니다.

기업이나 단체에서 연구비가 나오도록 논문을 쓰고 연구하는 것은 교수 몫이지만, 정작 연구비 통장은 학생들이 관리하도록 맡겨놓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교수들이 그렇게 하지요. 친구 교수도 그렇게 진행하고 있었고, 결제만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고소를 당한 것입니다.

나는 수용자들에게 설교하고 위로하며 교도소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뉴스제이

얘기를 들어보니 감정에 섞여 있는 고소 같았습니다. 이유야 어찌하든지 조사하면 나오니까, 정직하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화 중, 말미에 '판사에게 제출할 탄원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변호사가 했다며 전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내가 말했습니다.

“나도 탄원서 써서 보낼게. 나도 해야지”
“그렇게 해주면 고맙지, 고마워! 나 목사!”

그런데 대화 말미에 탄원서가 장단점을 동시에 가진다며 판사 걱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것보다, 손 글씨로 직접 쓰는 것이 더 진정성이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까? 있는 그대로 쓰면 되니까? 그런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탄원서 양식이 있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하면서 친구에게 문자를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판사에게, 어디로 보내야 하는지 문자를 남겼습니다.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친구에게 답이 없었습니다. 상황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바쁘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노트에 손글씨로 초안을 잡아가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쓰기가 은사요 특기인(?) 나에게 탄원서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있는 그대로 쓰면 되지만 친구니까 좋게만 쓴 것이라는 오해(?)와 내가 목사인 것을 알게 될텐데, 그럴 때 ‘목사니까 당연히 좋게만 쓰겠지’라는 당연성으로 제판부가 그냥 깊이 관심 갖지 않을 탄원서로 인식될까봐 조심스러웠습니다. 저는 재소자들에게 설교하고 위로하며 교도소 사역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탄원서를 잘 써야 한는 생각이 깊게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고, 친구에게 연락이 없었습니다. 나는 친구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있는데 자주 연락하는 것이 친구에게 부담이 될까봐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탄원서는 마음만 먹으면 1시간이면 쓰는 것이니까 몸 움직임 자체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머릿속에는 이미 정리되어 있었으니까요.

몇달 후, 내가 친구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시간만 흘러가는 것 같아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친구에게 문자로 남겼던, “어떤 판사에게, 어디로 보내야 하는 지” 묻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의 학교 강의가 화상으로 하는 것이기에 상황을 몰라 연결이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몇 번의 연결 끝에 친구와 통화가 되었습니다.

“O교수!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 재판은?”
“.... 뭐, 그냥 그래.”

친구의 말투가 평소 같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직 탄원서롤 보내지 않아 서운해 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탄원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탄원서 어떻게 하면 되는 거니? 어떤 판사에게 보내야 하는지 주소와 이름을 줘야지”
“탄원서는 내가 가지고 가는 거야?”
“뭐! 탄원서를 O교수가 가지고 가면 이상하잖니? 내가 보내는 것이 낫지?”
“아냐! 탄원서는 내가 제출하는 거야.”
“그래. 아직 완성은 다 안됐는데. 거의 됐어. 빨리 해야겠네. 손으로 쓰고 있어. 카메라로 찍어서 보내줄까?”
“아니야. 됐어. 괜찮아.”

친구의 딱딱하고, 냉소적이고, 차가운 바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몰랐던 사실입니다. 상식적으로 제3자가 좋은 의견을 내서 주는 것인데, 당사자가 제출하는 것이라니요. 탄원서 제출이 장단점이 있다는 말이 이해됐습니다. 난 정말 몰랐습니다. 친구는 내가 자기에게 보내주지 않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 25년전, 교회에서 영성훈련을 마치고, 일본으로 선교 'outreach'를 갔다. 당시 훈련원 책임자 임창표 목사(오른쪽 두번째)와 다른 동료들과 함께한 나(가운데) ©뉴스제이

내가 60에 가까운 50년도 넘게 살면서, 다른 사람들은 아는데 나는 몰랐던 사실입니다. 탄원서를 당사자가 가지고 간다는 것을 정말 몰랐습니다. 오해하고 있는 친구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앙금이 남은 오해가 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오해’가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친구야!!! 사랑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이사야 11: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 6-7)

며칠 후, 나에게 강의를 요청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겨났습니다. 나를 웃게 만들었고, 친구의 상황을 생각하며, 유머를 전달해 주고 싶었습니다.

“여보세요! 나가노(나관호) 목사님이시지요?
“네! 네!”
“혹시, 일본 목사님이세요?”
“네! 아니요, 한국사람인데요!”

이 웃음담긴 오해(?)의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내 이름이 ‘나관호’이다보니 소리음이 ‘나가노’로 들린데서 온 웃음이었습니다. 한국의 ‘나관호 목사’가 일본의 나가노동계올림픽이 열린 나가노현에서 사역하는 ‘나가노 목사’가 된 것입니다.

일본말 ‘나가노’(ながの)는 일본의 성씨입니다. 일본 도요타상사 회장 ‘나가노 가즈오’(永野 一男/ながの かずお)를 시작으로, 일본 프로야구에서 150km의 직구를 던지는 지바 롯데 마린스 선수 ‘나가노 쇼지’(永野 将司/ながの しょうじ), 일본 배우이며 모델인 ‘나가노 메이’(永野 芽郁/ながの めい)가 있습니다. 그리고 Z건담 디자인에 참여한 만화가 ‘나가노 마모루’(永野 護/ながの まもる), 배우 겸 가수인 V6 멤버 ‘나가노 히로시’(長野 博/ながの ひろし)와 일본 여성 성우 ‘나가노 아이’(永野 愛/ながの あい), 일본 여자 축구 선수 ‘나가노 후카’(長野 風花/ながの ふうか)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을 10여 차례 넘게 다녀왔습니다. 25년전, 교회에서 영성훈련을 마치고, 일본으로 선교 'outreach'를 다녀오기도 했고, 성가대 공연 그리고 피아니스트의 공연에 동행해 일본을 방문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일본은 가깝고도 먼나라가 맛습니다.

내 이름의 소리음만 듣고 생겨난 재미있는 오해(?)는 받을만 합니다. 나에게 이런 오해는 '웃음'을 주니 얼마든지 좋습니다. 그러나 친구의 '탄원서 오해'는 '이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두가지 '오해'를 통해 배웁니다. 오해'는 당연한 법칙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해'로 '오해'를 '눌러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더 나아가 '웃음'이 '오해를 '녹여 버린다는 것'을.... 

"모든 삶이 감사합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나관호(나가노/ながの) 목사 ( 뉴스제이 대표 및 발행인 / 말씀치유회복사역원 원장 / 치매가족멘토 / 문화평론가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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