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칼럼] '사랑과 예의'가 신앙과 믿음평가 기준
[십자가칼럼] '사랑과 예의'가 신앙과 믿음평가 기준
  • 나관호
  • 승인 2018.10.22 18: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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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관호목사의 행복발전소 16]

하나님은 믿음과 행동의 무게를 정확히 달아보신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불신자들이 만들어낸 호칭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

성경을 축소하고 또 축소해 응축시킨다면, 마지막에 남을 구절은 ‘누가복음 10장 27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누가복음 10:27)

사랑이신 하나님이 강조하고,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소망, 복음과 진리, 은혜와 감사, 신앙생활, 신학사상, 구원과 십자가 등 기독교의 모든 것의 기초석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빠진 믿음은신념이거나 자기암시가 됩니다. 믿음은 ‘좋고, 나쁘고’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작고, 크다’로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작은 믿음, 큰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크고, 작다’로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 자체는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투영된 삶으로 믿음이 나타나기 때문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를 많이 하고,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는 성도를 보면, 일반적으로 “믿음이 좋으세요”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행동을 달아보아 무게를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보여진 것으로 무게를 가늠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믿음과 행동의 무게를 정확히 달아보십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사무엘상 2:3)

 믿음의 행동 중 중요한 것이 ‘예의’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예의를 지킵니다. 예의 없는 능력과 예의 없는 신앙생활은 모조품입니다.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함부로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사람은, 사람을 함부로 막대합니다. ‘불량 크리스천’의 행동입니다. 예의는 믿음의 열매요, 지표입니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크리스천은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어느 집에 가서 아이들의 예의 상태를 보면 ,그 가정의 현실과 교육 상태를 알게 됩니다. 어른을 보면 두 손 모아 정중하게 인사하는 자녀를 보면, 가정교육이 잘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과 부교역자들의 외부인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교회의 수준을 알게 됩니다.

 작금의 한국교회가 지탄의 대상 되고 있는 것은, 삶의 열매가 세상 사람들이 기대하는 종교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옆자리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크리스천은 “예수 믿는 것들”, “아휴, 그것들”, “예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것들” 등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예의’라는 말이 크게 들려왔습니다. 그들의 대화 속으로 끼어들어갈까를 생각했을 정도로 불쾌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좋은 크리스천, 믿음이 큰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은데, 어떤 성도들과 접촉했기에 저러나 싶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은 삶의 플래카드(placard)를 걸고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중 하나의 플래카드가 ‘예의’입니다.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느 교회이든그 교회의 수준을 첫 평가할 때 부교역자들의 예의 태도를 보면됩니다. 부목사나 전도사들은 담임 목사를 대신해 성도들과 외부사람을 먼저 대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전화 받는 태도나 전화약속 태도에서 예의 수준, 즉, 믿음을 알게 됩니다.

 어느 교회를 가면 정중하게 일어나, 담임 목사님에게 친절하게 안내하고, 기다림의 시간에는 커피도 대접해주고, 손님을 넘어 외빈으로 대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반면, 어느 교회는 예의가 없이 부교역자가 손님이 오든 말든 냉냉하고, 안내도 없고, 외빈 대접도 없는 교회가 있기도 합니다. 신앙의 기본기를 배우지 못하고 목사와 전도사가 된 사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신학교 교과 과정 중에 ‘신앙예의’를 가르치는 과목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 중, 한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되기 전에 사람부터 되라.” ‘사람부터 되라’는 것은 ‘인성을 갖춘 사람, 예의 바른 목사와 전도사’가 되라는 말입니다. 신앙 속 예의는 아주 중요한 열매입니다. 거듭난 사람, 믿음이 큰 사람은 다른 말로 말해 ‘예의 바른 사람’입니다. 믿음과 신앙예의가 같이 자라야 합니다. ‘매너 있는 크리스천’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은 크리스천의 삶의 지표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

 ‘크리스천’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불신자들이 만들어낸 호칭입니다. ‘크리스천’은 헬라어로 '크리스티아노스'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분을 믿고 구주로 고백한 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예수님의 제자', '기독교인', '성도', '하나님의 백성'을 말합니다. 사도바울 당시 수리아 안디옥 교회 성도에게 처음 사용되었던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벧전4:1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1:26)

 처음에는 불신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인' 이라는  용어는 믿는 자들에 대한 다소 멸시하는 의미의 용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무리', '그리스도를 좇는 성도'라는 복 되고 영광스런 호칭으로 사용되어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그렇게 전환되어 말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착한행실, 예의 바른 삶, 예수님처럼 희생하며 사는 삶을 보고, “역시, 크리스천이야.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라고 불신자들이 인정해준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고난 받는 성도를 향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받는 것을 부끄러워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 권면하면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얼마나 영광스런 것인지를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전서4:16).

 

나관호 목사 (치매가족 멘토 / 작가, 칼럼니스트, 문화평론가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좋은생각언어&인생디자인연구소 소장 /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강의교수 / 기독교윤리실천 '한국 200대 강사'에 선정된 커뮤니케이션 및 대중문화 전문가' / 세계선교연대 경기북부 노회장 / ‘미래목회포럼’ 정책자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회’ 전문위원 / <뉴스제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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