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거사 111 주기’ ... “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 의사, ‘거사 111 주기’ ... “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 배성하
  • 승인 2020.10.25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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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 오전 10시 개최/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사)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카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외침/
어머니, "사형이 선고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느님 앞으로 가라"/

【뉴스제이】 배성하 기자 = '안중근의사 의거 111주년 기념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다고 '국가보훈처'가 23일 밝혔다.

코로나19 때문에 이번 ‘안중근의사 거사 111주기 기념행사’는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외부 인사를 초청하지 않고 숭모회 임원과 안 의사 유족 등으로 참석 인원을 최소화한 조촐한 행사로 대체 된다.

다만, ‘숭모회 누리집’(www.patriot.or.kr)을 통한 '온라인 중계'로 누구나 비대면으로 기념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라고 보훈처는 전했다.

사단법인 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 주관으로 열리는 기념식은 안 의사 약전봉독, 기념사, 장학금 전달식, 기념공연,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哈爾濱) 역에 잠입해 러시아군의 경례를 받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같은 해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뤼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된 안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안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뤼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된 안 의사는 이듬해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의 안중근 의사에게로 돌아가 보자. 

안중근 의사는 "여러해 소원한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둑이 내손에서 끝나는 구나"라며 남몰래 기뻐했다. 그리고 지체 없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척살하기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東淸鐵道)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南長春)역, ‘관성자’(寬城子)역과 만주철도의 도착지인 ‘하얼빈’(哈爾濱)역, ‘채가구’(蔡家溝)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빈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열차가 정착하는 전략요지인 채가구역에서는 우덕순과 조도선이, 하얼빈역에서는 안중근이 거사를 결행키로 했다. 그러나 채가구에서 준비한 거사는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수상히 여긴 러시아 경비병들이 투숙한 역 구내에 있는 모든 여인숙을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건 의사의 거사 계획뿐이었다.

안 의사는 10월26일 새벽 하얼빈역으로 나가 러시아 병사들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들어가 역구내 찻집에서 이토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가 오전 9시 15분에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토가 오전 9시 15분 하얼빈 역에 도착해 차내에서 환영 나온 러시아의 재무상 블라디미르 코콥초프(Vladimir Kokovtsov)와 약 25분 정도 대화한 후, 그의 권유에 따라 명예 사령관으로서 러시아 수비병을 사열하기 위해 열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러시아 군대 앞을 막 지나가는 순간, 안 의사는 앞으로 뛰어나가면서 브라우닝 권총으로 4발을 쏴 3발은 이토에게 명중, 그 중 두발은 복부를 맞췄다.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의 오른 팔을 맞혔다.

안중근 의사는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 것을 대비해 다시 3발로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 중상을 입혔고 안 의사를 죽이려들며 해를 끼치자 일본군 장교 1명을 사살했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어로 “카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대한민국 만세)를 두어 차례 외친 뒤 러시아 헌병에게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잠시 신음하다가 피격 30분 뒤인 오전 10시경에 사망했다.

안 의사는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심문에서 한국의용병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안 의사는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거쳐, 뤼순(旅順)에 있는 일본 관동 도독부 지방법원에 송치되었다. 감옥으로 이송된 안 의사는 이듬해인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에 이르기까지 6회에 걸쳐 재판을 받았고, 2월14일 오전 10시 30분 재판장 마나베는 일제의 각본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죽음을 앞둔 몇일 전, 안 중근 의사는 안정근ᆞ 안공근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하지 말라ᆢ.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고 유언하였다

그리고 "사형이 선고되거든 당당하게 죽음을 택해서 속히 하나님 앞으로 가라"는 모친의 말에 따라 안 의사는 이후 공소도 포기한 채, 뤼순 감옥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저술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안응칠역사』는 자서전이고, 『동양평화론』은 거사의 이유를 밝힌 것이다

안 의사는 『동양평화론』 집필을 시작하면서, 이것을 끝낼 때까지 만이라도 사형집행을 연기해 줄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사형을 집행하였고, 의사는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뤄순 감옥의 형장에서 만 31살의 꽃다운 나이에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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