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과 한국해병대
인천상륙작전과 한국해병대
  • 박환인
  • 승인 2020.09.16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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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해병대, 1949년 4월 15일 창설/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380명 병력으로/
美 해병대 제1사단과 육군 제7사단 참여/
한국 해병대 제1연대와 육군 제17연대 참여/

【뉴스제이】 대한민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380명의 소수 병력으로 창설되어 6.25전쟁 발발 직후 장항, 군산, 이리지구 전투에 처음으로 투입되었으며 낙동강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미 해병대 제1사단, 미 육군제7사단,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함께,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학도병 3,000명을 모집하여 해병대 제1연대로 증편하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9월 1일 제주도를 출항, 9월 6일 부산에 도착하여,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연합으로 단기간 특수훈련을 실시한 뒤, 9월 12일 미 LST Q3호와 피카웨이호에 탑승하여 부산항을 출항, 인천으로 항진하였다.

연합상륙군은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 제1연대, 미 육군 제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로 구성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의 작전부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작전에 참가한 총병력은 7만 5천 명으로, 9월 13일부터 15일까지 48시간 동안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200여대 항공기의 항공폭격과, 화력지원 함정의 함포 지원하에, 월미도에 대한 제압사격을 실시하였다.

제1단계는 월미도 선점작전으로 9월 15일 0시를 기해 미 해군 클라크 대위, 육군 계인주 대령, 해군 연정 소령, 최규봉 KLO부대장 외 2명의 특공대는 팔미도에 침투하여 팔미도 등댓불을 점화한 후, 등대에 성조기를 걸어놓은 것을 신호로 해군 공격전대는 협수로를 통하여 인천항으로 접근한 후 9월 15일 06시 30분 로켓포함이 월미도의 녹색 해안을 강타하는 동안 미 해병대 제5연대 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월미도에 상륙하여 M26전차의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여 상륙 후 1시간 만에 월미도를 확보하였다.

제2단계는 인천 일대에 해단 두보를 확보하는 작전으로 당일 17시 30분 미 해병대 제5연대(-)와 한국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주정으로 적색해안인 만석동 지역으로 상륙하여 5m의 암벽을 사다리로 기어오르는 상륙을 감행하였고 미 해병대 제1연대는 상륙돌격 장갑차로 청색해안인 송도해수욕장의 서부 지역으로 상륙하여 상륙돌격 장갑차에서 사다리를 타고 5m 암벽을 넘어 상륙을 감행하여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군 인천경비여단과 제8사단 및 31사단을 격파한 뒤 해안 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후속 제대로 9월 18일 미 육군 제7사단과 9월 24일 한국 육군 제17연대와 해병대 김성은부대가 인천에 상륙하여 한·미 해병대가 함께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수행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미 8군은 총반격 작전을 감행하게 되었다.

당시 신현준 사령관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9월 15일 17시 30분에 적색해안인 인천 만속동해안에 상륙하여 9월 16일부터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한·미 해병대 및 육군은 계속해서 경인가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하여 북한군의 주력을 격멸하여, 9월 20일부터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여세를 몰아 수도 서울을 조기 탈환하여 9월 27일 0610시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 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적 사살 1만 4천명, 포로 7천 명의 대전과를 올린 반면, 미 해병 1사단(전사 415명, 부상 2,029명, 실종 6명) 한국 해병대(전사 97명, 부상 300명, 실종 16명) 미 제7보병사단 32연대(전사 66명, 부상 272명, 실종 47명) 등, 4,000여 명의 병력손실이 있었다.

 

박환인 장로 (전, 해병대 부사령관, 예비역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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