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회장, 카이스트에 발전기금 766억 쾌척...“KAIST에서 노벨상 수상자 나오길 바래”
이수영 회장, 카이스트에 발전기금 766억 쾌척...“KAIST에서 노벨상 수상자 나오길 바래”
  • 배성하
  • 승인 2020.07.26 02: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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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전 재산 기부/
‘KAIST 개교 이래 최고 기부액’/
경기여고·서울법대 '엘리트 인생'/
2년 전 대학 동기인 첫사랑과 결혼/
KAIST에서 노벨상 수상자 나오길 기대

【뉴스제이】 배성하 기자 = 본지 발행인 나관호 교수목사의 절친인 모대학 교수로부터 목사님에게 급히 연락이 왔다. KAIST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유학 후 귀국,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는 친구분이다. "나목사님! 좋은 기사 하나 있는데....." 그 제보(?) 전화는 광원산업 이수영 회장님의 'KAIST 기부'에 대한 이야기였다. 중앙일보에서 속보로 따끈한 기사가 막 다뤄진 상태였다. "81세에 첫사랑과 결혼했다, 83세 여걸의 766억 쾌척"

평생 모은 재산을 KAIST에 발전기금으로 기부한 ‘83세 기업인 여걸’이 주목을 받고 있다. 이번에 기부하는 금액만 무려 676억원. ‘KAIST 개교 이래 최고 기부액’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 주인공은 바로 이수영(83) 광원산업 회장이다.

80년 넘게 독신으로 살던 이 회장은 2년 전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이며 첫사랑이었던 현재의 남편과 결혼했다. 대구지검 지청장을 지낸 김창홍 변호사가 그 주인공이다. 재력가의 기부에는 가족들의 으레 반대가 따를 수 있지만 이 회장은 “남편이 오히려, ‘이왕 마음먹은 거 빨리 하라’며 기부를 독려했다”고 전했다. 이처럼, 남편은 장학사업으로 제2의 인생을 사는 이 회장의 든든한 조력자다.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이 지난 23일 오후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열린 발전기금 기부 약정식에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이 회장은 지난 2012년과 2016년 이어 이날 세번째로 676억원 상당의 부동산을 KAIST에 쾌척했다. 기부액은 카이스트 개교 이래 최고액인 766억원 이다. (사진 : 프리랜서 김성태 - 중앙일보)

이 회장이 KAIST에 기부금을 낸 것은 이번이 세번째다. 2012년 약 80억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유증’(유언으로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무상으로 타인에게 증여)한데 이어, 4년 뒤인 2016년 또 다시 10억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내놨다. 이번에 약정한 금액까지 합하면, 총 766억원의 발전기금을 쾌척한 것이다. 이 회장은 현재 ‘KAIST 발전재단 이사장’도 맡고 있다.

이 기금은 KAIST ‘싱귤래러티(Singularity) 교수’ 지원에 사용될 예정이다. ‘싱귤래러티’에 선발된 교수는 임용 후 10년간 논문 평가를 받지 않고, 오직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다. KAIST가 국내 최초로 도입한 제도다. 이를 통해 KAIST에서 국내 최초의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것이 이 회장의 바람이다.  

카이스트 KI빌딩 정문. (사진: KAIST)
카이스트 KI빌딩 정문. (사진: KAIST)

서울대 법대 출신인 이 회장이 모교가 아닌 KAIST에 가장 많은 금액을 기부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래는 과학기술 발전에 달려있고, 한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관이 KAIST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만큼 KAIST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각별하다. 이 회장은 “세상 만사는 사람으로 시작해 사람으로 끝난다”며, “국내 GDP의 16%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석ㆍ박사 연구인력의 25%가 KAIST 출신”이라고 설명했다. 2년 전 펴낸 이 회장이 자서전의 제목도 ‘왜 KAIST에 기부했습니까?’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이 회장은 법조인 대신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1963년 서울신문에 입사해 한국경제신문을 거쳐 서울경제신문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1980년 전두환 정부의 언론통폐합 때 강제 해직됐다.

이 회장이 사업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기자 재직 시절 시작한 주말농장이 계기가 됐다. 농장 규모가 커지자 낮에는 신문사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경기도 안양의 목장에서 돼지와 소를 키웠다. 목장과 서울을 오가느라 하루에 한 시간 남짓 차에서 눈을 붙이며 살기도 했다.  

“나는 과학은 모르지만, 과학의 힘이 얼마나 큰 줄은 압니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과학기술 인재를 키워주기 바랍니다.

바라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기자를 그만두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농장 일과 사업을 벌였다. 선친이 딸의 결혼 비용 등으로 남긴 50만원 짜리 적금통장 두 개가 사업 밑천이었다. 돼지 두 마리로 시작한 목장은 1000마리로 늘어나 전국에 소개될 만큼 주목 받기 시작했다. 돼지 출하 과잉으로 가격이 폭락했을 때는 돼지고기를 ‘국군장병 위문품’으로 돌려 이익을 남겼고, 우유가 남아도는 ‘우유 파동’ 때는 농림부에 ‘초등학생 우유 무료 제공’을 건의해 판로를 뚫었다.  

이 회장은 목축업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모래채취 사업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부를 일궜다. 1988년에는 부동산 사업을 시작하며 광원산업을 세우고, 여의도백화점 일부 매입 등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고, 미국에서도 부동산을 매입했다. 덕분에 미국의 연방정부가 세를 들어 있는 빌딩의 ‘건물주’라는 재미있는 타이틀 까지 가지게 되었다. “성조기가 펄럭이는 건물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니 뿌듯했다”는 그 마음이 KAIST에 유증을 결정했고, 그 건물은 ‘KAIST 발전기금’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했다.
  
한편, 이 회장은 조직폭력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신장암으로 죽음의 고비도 넘겼다. 그것이 “어떻게 모은 돈인데… 의미 없이 쓰이길 바라지 않았다”고 말한 배경이다. 이 회장은 “젊은 학생들은 조금만 도와줘도 스스로 발전해 사회에 더 큰 공헌을 한다”며, "KAIST에 기부하고 참 행복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참고기사 : https://news.joins.com/article/2383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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