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복, "독도는 우리땅" 증명 ... 조선시대 ‘독도 지킴이’로 "일본 ‘셧다운’(shutdown)"
안영복, "독도는 우리땅" 증명 ... 조선시대 ‘독도 지킴이’로 "일본 ‘셧다운’(shutdown)"
  • 배성하
  • 승인 2020.07.13 08: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울릉도-독도’ 특집/
조선시대 ‘독도 지킴이’ 안영복 다뤄/
허락없는 '도일'(渡日) 이유, 조선정부 처벌/
일본 막부, "울릉도 도해 금지 명령']"/

【뉴스제이】 배성하 기자 =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이하 ‘선녀들’)가 방송 1주년을 맞아 ‘울릉도-독도’ 특집을 펼쳤다. 그동안 시청자들에게 잊고 있던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것은 물론, 역사 지식을 쉽고 재밌게 풀어내며 많은 사랑을 받은 ‘선녀들’. 첫 돌을 맞아 시청자들에게 애국심을 뿜어내게 만들 ‘울릉도-독도 특집’을 선물했다.

'선녀들’은 계속해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망언에 맞서 ‘독도는 우리땅’임을 증명하는 ‘종합 팩트 폭격 세트’를 준비했다. 조선시대 ‘독도 지킴이’였던 어부 안영복에 대해 다뤘다.

MBC '선을 넘는 녀석들-리턴즈'(이하 ‘선녀들’)가 방송 1주년을 맞아 ‘울릉도-독도’ 특집을 펼쳤다. 그동안 시청자들에게 잊고 있던 역사의식을 일깨웠다. (사진 : MBC 제공)

이에 ‘선녀들’은 독도에 가기 앞서, 울릉도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독도는 우리땅’ 증거를 찾아 나섰다. 역사 기록을 따라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빼도 박도 못할 증거들과 우리의 역사 자료 외에도, 일본 스스로 자신들의 역사에 남긴 증거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일본의 역사 자료에 고스란히 남은 ‘독도=한국땅’ 증거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어부 안용복. 그의 두 차례 일본 항의 방문으로 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일체 하지 못했다. 안영복은 일본을 ‘셧다운’(shutdown)시켰다.

안용복의 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있었다. 울릉도에 대한 조선의 방침은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이었다.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은 몇 차례 섬에 관리를 보내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쇄환(刷還)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울릉도는 사람은 살지 않고, 어로 활동만 이뤄지던 곳이었다. 이를 두고 일본 학자들은 조선 정부가 섬을 '방치'했다고 하지만, 우리 학자들은 주기적으로 섬에 관리를 파견해 거주민을 쇄환하는 식으로 섬을 '관리'했다.

안용복은 울산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일본 어부들과 '충돌'했다. 일본 어부들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당당하게 대응했다. ‘끌려갔다’는 설과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설이 나뉜다. 조선의 영토인 울릉도에 왜 일본 사람들이 오가느냐며 강하게 항의한 것이다. 이에 놀란 호키 주 태수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중앙정부 격인 '에도 막부'에 보낸다.

막부의 회신은 그해 5월에 도착한다. 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는 내용의 서계(書契)를 써준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은 울릉도와 그 근처 섬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1694년 장한상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하게 된 것도 그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태정관이 竹島(죽도) 즉 우리의 울릉도와 外一島(외일도) 즉 우리의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쓴 지령 문서(오른쪽)와 두 섬을 그린 지도.

이 무렵 조선과 일본은 일본 대마도와 조선 울릉도 등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두고 복잡한 논의를 벌였다. 그 결과 1696년 1월 일본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도해와 어업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한다. 울릉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안용복은 1696년 5월 2차 '도일'(渡日)을 감행한다. 울릉도에서 여전히 조업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그는 직접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귀국 후 그는 허락 없이 일본으로 갔다는 이유로 조선 정부에 의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무모해 보였던 안용복의 업적이 더 커 보이는 이유는 일본이 19세기 말에 울릉도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가 사람이 살지 않던 울릉도 개척을 결정한 것은 1880년대 초다. 1883년에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살게 된다. 조선의 이런 결정을 촉진한 것은 울릉도에 불법 체류하던 일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개항과 메이지 유신 이후 대외 진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는 배 위에서 울릉도를 본 일본인들은 이 섬을 새로운 영토로 파악하고, 영토로 개척하는 청원을 여러 차례 일본 정부에 제출한다.

이에 일본은 1880년 7월 군함을 보내 '울릉도'를 조사한다. 그리고 보고서를 통해 "이 섬은 17세기 말부터 '죽도'라 부르던 것으로, 일본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확인한다. 이들이 '울릉도'(일본식 명칭 '죽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던 이유는 '위대한 어부' 안용복의 '도일'(渡日)로 일궈낸 일본 막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 명령" 때문이었다.

당시 불법 조업을 하던 일본인들에게 붙잡혀 간 안용복은 납치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호통을 치며 “독도는 우리땅”임을 바로잡았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안용복은 또 한번 일본으로 건너가 관리들에게 강력한 항의를 하며, 일본 역사에 ‘독도는 한국 땅’임을 증명한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선녀들’은 2020년 현재까지 일본의 입을 다물게 만든 안용복의 큰 그림에 감탄을 터뜨렸다. 시청자들의 속을 뻥 뚫어줄 조선시대 ‘독도 지킴이’ 안용복의 이야기에 호기심이 더해졌고, 우리에게 소중한 역사 증거를 남긴 안용복의 화끈한 활약상이 공개됨으로써 우리들에게 독도와 안영복에 대한 역사의식을 새롭게 했다.

한편, 희생과 고난으로 두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우리 땅임을 확약 받았던 조선의 백성 안용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3년 10월에 ‘안용복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기념관에는 독도관련자료 전시실, 동영상 시청각실, 야외광장,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용복 기념관'은 울릉도에서도 외진 곳인, 북면 석포(천부4리)마을 정상에 지하 364㎡, 1층 934.51㎡, 2층 977.54㎡ 규모의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150억 원을 들여 경상북도 울릉군이 건립했다. 기념관은 외부는 화강석과 깃 복층유리로 처리하는 등 최고급 자재로 마감했다. 1층은 독도교육장 등으로 사용하는 강당과 창고, 로비, 휴게실, 화장실, 방송실, MDF실, 관리사무실이, 2층은 제1, 2전시실, 라운지, 홀, 창고 세미나실, 수장고 등으로 이뤄졌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안보면 후회할 기사
카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