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진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6ㆍ25 진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 배성하
  • 승인 2020.06.2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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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70주년 파워인터뷰] 前 해병대 부사령관 박환인 장로

6ㆍ25 잘못 알고 있는 것 전하고파/
6ㆍ25, 통일전쟁이 아닙니다/
6ㆍ25, 수많은 기독교인 숙청당해/

【뉴스제이】 우리 역사 반만년에 6.25전쟁 같은 참화는 없었다. 전무후무하다. 그리고 거기 따른 역사적 의의 역시 획기적이다. 그 의미는 거대 민족사의 중추를 이룬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어디에도 6.25전쟁 기념비가 없다. 기념일도 행사도 드물다. 6.25를 통한 사상자는 행방불명, 고아, 피난민, 이산가족을 합치면 총 인명 피해가 천만여 명이나 된다.  6.25당시 교회의 피해는 목사 540명, 신부 180명 순교로, 일제 36년간 순교자 수의 8배가 넘는다. 파괴된 교회가 890여 곳이었다.

6ㆍ25전쟁이 발발한지 70주년. 반세기가 훌쩍 넘는 시간이 지나 전쟁을 기억하는 세대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6ㆍ25전쟁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알고 있어도 잘못 알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6ㆍ25전쟁 진실알리기운동본부’의 주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가 있다.

지난 1990년 해병대 부사령관으로 나라를 수호하다 소장으로 예편한 박인환 장로(여의도순복음교회)다. 박 장로는 이 전쟁이 외침(外侵)이 아니라 동족끼리의 비극이라는 것은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명제임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북한 등 외부 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지난 천안함 사태 이후 극명하게 드러나는 남남갈등으로 봤다.

▲ 박환인 장로는 이 전쟁이 외침(外侵)이 아니라 동족끼리의 비극이라는 것은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명제임을 강조했다.
▲ 해군사관학교 자랑스런 ‘해사인상‘ 수상식장에서 가족과 함께

- 6.25 전쟁이 발발한지 올해로 70년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훌쩍 넘다 보니 어린이들은 물론 20대 조차 6.25전쟁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 6ㆍ25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10년전인 2010년 1월 국방부 산하 NGO 단체로 ‘6ㆍ25 진실알리기운동본부’를 승인 받았습니다. 잘 알지 못한다면 ‘알리기’라고 하면 되는데, ‘진실알리기’라고 한 것은 6ㆍ25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 아는 것이 불안요소가 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6ㆍ25전쟁은 북한에 의한 남침인데 북침이라고 하는 것이나, 통일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6ㆍ25가 통일전쟁이 되면 자연스레 미군은 훼방꾼이 되고, 거기서부터 문제가 복잡하게 됩니다. 역사를 왜곡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나는 자녀와 며느리에게 먼저 6.25 진실 알리기를 했습니다. 아들이 금융회사 간부인데 군인이 아니더라고 금융 분야에서 나라사랑을 실천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할 일이 무엇인지 찾아 헌신하라고 가르칩니다.

 

믿음의 동역자 고영자 권사와 함께
믿음의 동역자 고영자 권사와 함께

- 6.25를 겪은 세대들이 경험담이 사라지면서 6.25가 잊혀지는 것 같습니다. 장로님이 겪었던 6.25는 어땠습니까.

제가 중2때 일이라 기억이 선명합니다. 지금은 남원시로 승격됐지만 당시 행정상으로 남원읍에서 태어났습니다. 교통 요충지였죠. 그래서 북한이 남침하거나 후퇴할 때 남원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중2때면 이념이 뭔지도 잘 모를 때였죠. 비행기가 뜨고 대포소리, 총소리가 나니까 읍내에서는 못 있고, 시골 할머니 댁에 피란을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전투는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남원이 지리산 아래다 보니 빨치산에 대해 들었던 잔인한 소문들과 북한군 토벌 작전 본부가 우리 중학교였던 것, 우리 동네에 장군이 지나가던 것들이 기억에 납니다. 전쟁에 대한 것들은 후에 전쟁 기록과 영화를 보고 잘 알게 됐지요.

 

- 기독교인이 6.25전쟁을 바라봐야 하는 시각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6ㆍ25전쟁은 일본이나 중국이 영토확장을 위해 침략한 외침이 아닙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아무리 빨리 끝난다 해도 수십만 명이 죽게 될 줄 알면서도 벌어진 동족상잔 전쟁입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공산주의자들이 북한을 점령하자마자 장대현교회를 없애고 김일성 동상을 세운 것, 수많은 기독교인을 숙청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6ㆍ25 당시 기록을 보면 목사 540명, 신부 180명이 피살된 걸로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따라야겠지만, 독일 나치 수용소에 있는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는 말라’는 말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실체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 해병대 부사령관을 지내셨는데요, ‘귀신도 잡는다’는 해병대에서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1977년 포항에서 대대장하던 시절에 군에 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윗분들이 불교를 많이 믿을 때였습니다. 또 저희 집은 아버지가 원불교 원로를 지내신 원불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학교 때까지는 원불교도였습니다. 기독교를 접근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서 주위에서 권유도 있었지만 안 믿었던 이유는 내 자신을 믿어왔기 때문이었죠. 성적도 좋고 건강하고 잘나갔기 때문에 얼마든지 내 힘으로 목표를 달성하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작스런 계기가 생겼습니다. 제가 대대장이던 시절 연대장이던 선배가 계셨는데, 그분은 자연스럽게 곧 장군이 될 것이라고 모두가 인정하던 분이었거든요. 그런데 간첩이 그 부대 근처에 왔다가 소대장과 전령을 쏘는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중대장부터 연대장까지 모두 전역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세상 일이란 게 내 뜻대로 안되는구나. 하나님께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요. 난 시간을 돌아보면 저는 군인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집안 환경도 그랬고요. 군대 가게 됨으로 하나님 믿게 된 것이 예비하심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잘못 된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잘 되게 해주시는 간증을 저에게 많이 주셨습니다. 해병대에서 부사령관까지 했으니 큰 은혜와 도우심을 입은거지요.

▲ 전역 후 해병부대 훈련장을 찾아 옛 부하들과 함께한 박환인 장로
해병대 부사령관시절 군 동료들과 함께 (오른쪽 세번째 박환인 장로)

- ‘6ㆍ25 진실알리기운동본부’를 통해 앞으로의 계획을 부탁드립니다

10년 전, 국방부 산하 NGO 단체로 ‘6ㆍ25 진실알리기운동본부’가 승인되면서,  〈6ㆍ25란 무엇인가〉라는 책자와 만화로 된 〈창이와 숙이가 겪은 6ㆍ25〉를 만들어 배포했습니다. 6ㆍ25를 설명하는 20분짜리 동영상도 보급과 함께 어린이들을 위해 글짓기와 웅변대회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지끔까지 이런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6ㆍ25전쟁을 제대로 모르는 세대, 안보의식이 없는 세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걱정은 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인데, 나라 안보를 위한 기도도 중요하지만, 기도와 함께 행동에 옮기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또 각 가정마다 교육을 통해 6ㆍ25에 대해서도 잘 알렸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북한과의 전면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우리 내부에서 붕괴하기 시작하는 것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고뇌하되 행동하는 자세가 여러 면에서 필요할 것입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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